般若波羅蜜多心經의 연구(5)! 2023. 8. 20. 일. 오늘이 다섯 번째 시간으로 '般若心經'을 강론 하는 시간이다. 참 깨달아 알면 알수록 그 지혜의 깊이와 크기에 놀란다.
이 제 5 講論의 主題 :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모든 법의 "공"한 모습, 생성된 모든 존재의 본질이 "공"하다는 것이다.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보살은 설파합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깨달은 바로는, 바로 반야의 세계를 통하여 본즉(照見)은! 이세상의 모든 법이라고 하는 것은 '제법이 공상이라'. 즉, "태어남도 멸함도 없고,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으며, 늘어남도 줄어짐도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제법(諸法)은 이 세상에 있어짐의 '모든 것'을 뜻함이라. 즉, 모든 다르마(dharma)를 가르킨다. 이 '다르마'라는 인도의 종교, 사상, 또는 불교의 중요한 개념으로, 불교에서는 법(法)으로 한역된다. 이 말은 '유지한다', '지지한다'를 의미하는 동사의 어원 dhr-에서 파생하여, 그런 작용을 실체화한 명사로, '유지하는것', '지지하는 것'의 원뜻이다. 여기서 법이라고 하는것은 무슨 거대한 '도'를 말함이 아니고,존재하는 모든 것. 사건과 event. 사태등을 나타내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공상(空相 : 비어 있는 모양)에서는 생멸(生滅)도 없고, 구정(垢淨)도 없으며, 증감(增減)도 없다는 말이다. 다시말하여 공상(空相)의 세계에서는 다 비어 있음으로 이런 것들의 작용은 더우기 없다는 의미이리라.

반야밀다를 깨달아 조견한 이cosmos의 세계는 생(生)하지도 아니하고 멸(滅)하지도 아니한다. 또한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아니하다.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아니한다. 이와 연관한 사상을 좀 더 살펴보면, 대승불교의 교리를 보다 더 체계화한 승려 용수(龍樹)대사는 공(空)과 중도(中道) 이론을 체계화하여 대승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쳐 대승8종(大乘八宗)의 종사(祖師)라고도 불린다. 그는 모든 현상은 그 나름의 인과관계로 나타난다는 석가의 연기설(緣起說)을 바탕으로 대승불교의 기반이 된 '반야경'에서 강조된 ‘공(空)’을 논증하였다. 그는 모든 현상은 인과관계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스스로 독립해 존재하는 불변의 실체는 없다고 보고, 모든 존재는 무자성(無自性)이며 공(空)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용수의 공은 무자성공(無自性空)이라고 나타내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이 반야심경을 이해하고 그 내용을 터득하기에는 그저 단순한 생각과 우둔한 방법으로 접근하면 그 내용의 실체를 조금 알 수가 있을 것인즉...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이전에 "공즉시색"에서 "공"은 곧 "색"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공" 가운데 "색"이 없다고 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색"에서 "공"을 찾았다면, 이 구절은 반대다. "공"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다. 나도 없고, 일정한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가지고 연쇄적으로 일어난다는 "공"의 성질. 즉, "공성"을 깨닫고 나니 색과 수상행식이 모두 없더라는 말이다. 나와 다른 것을 구별하는 분별을 끊고 차별 없이 "공"의 입장에 바라보면, "색(몸)"도 없고, "수상행식(마음)도 없다는 말이다. 허망하다는 말이다.
이제 공(空) 속에는 색. 수. 상. 행. 식이 '모두 다 없다'라는 말이 좀 이해가 되는 것 같다. 불교에서 인간과 그 밖의 모든 존재 속의 인식작용을 18가지 범주로 나눈 것.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을 합한 것이다. 즉, 눈· 귀· 코· 혀· 피부(살)·마음(뜻)의 6종의 감각기관, 즉 육근과 그 대상인 물질(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 현상(法)의 6경, 그리고 이 6근과 6경을 연(緣)으로 하여 생기는 6가지 마음의 활동, 즉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의 6식을 말한다. 이 6식을 제외한 12가지를 12처(處)라고 한다. 육근과 육경은 지속적으로 우리에게서 무언가 만들어내는데,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도 한시적 만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사람의 감각기관을 보통 말해서 주관(subject)라고 하며, 각ㅁ각의 대상 세계를 객관(object)라 부르지요. 불교는 이 주관을 육근(六根)이라고 하고, 객관을 육경(六境)이라 하고, 이 육근과 육경 사이에서 성립하는 작용을 식(識)이라 부른다. 이 세그룹을 합쳐서 십팔계(十八界)라 하지요.
좀더 살펴보면, 오온(五蘊 : 색. 수. 상. 행. 식)에도 이 '식(識)'이 다 들어 있지요. 식이란 '의(意)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이라는 것은 현상을 아는 것(자각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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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눈의 의식을 안식(眼識)이라고 부르고, 이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그러한 고로, 육근과 육경과 그 사이의 작용인 육식의 모두가 다 공(空)이 되어서 인간 인식의 모든 작용인,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그 의미를 아는 것(識界)이 다 공하다는 설법이다. 결론으로는 안식계로부터 의식계에 이르는 여셧 단계의 식계(識界)가 다 없다는 것이다. 내지(乃至)는 '역부여시(亦復如是)와 같은 축약입니다.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다.
무명(無明)이 무엇인가? 미혹한 세계의 인과관계를 설명한 것이다. 12지 연기 또는 12인연이라고도 한다. 그 12의 지분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六處)·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등이다. ‘무명(無明)’은 미혹의 근본으로서의 무지로, 사제(四諦)와 연기 등의 올바른 세계관· 인생관을 모르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고뇌와 불행이 일어나는 근본원인은 올바른 세계관 ·인생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고집멸도도 없으며, 지혜(just knowledge, not wisdom)도 얻음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여기서 말하는 '앎도 없고 얻음도 없다'. 이 지(智)는 반야의 지혜가 아닌, 그냥 안다(just knowledge)이다.반야는 잃어버림으로 비로소 깨달음을 '지혜'라고 한다. 오늘날 소인배들이; 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 이다고 생각한다. 알아지는 것도 잃어지는 것도 역시 없다는 의미이지요. 반야를 통하여서 무엇을 '얻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다. 이 말의 교훈은 결국에 '지(智)를 버리고 득(得)을 버리라'왜냐하면 반야 그 자체가 '무소득'이기에...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 故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顛倒夢想 究竟涅槃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함으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다. 마음에 걸림도 없고 장애가 없기에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과 꿈따위를 멀리 던져버리고 끝내는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고로 무상(無上)의 정등각(正等覺 : 우주의 일체 만상을 두루 아는 지혜)을 얻는다. '아뇩다라삼막삼보리'는 단지 'anuttara samyak - sambodhi'의 음역이다. 그 의미는 위가 없는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말한다. 더 이상이 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말한다.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그러함으로 다음의 사항을 주지해야 한다.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上)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지(知)는 전체에 걸리는 동사이다. 다음의 모든 사실을. 신주. 명주. 무등등주를 다 알지어다! 이것은 결코 반야바라밀다를 주문화 하거나 주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주문(呪文. mantra는 인간의 논리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설명이 불가한 것을 노래나 시로 표현된 것을 말한다. 성경의 4복음서도 처음 예수가 죽고난 후에 얼마간 글자로 기록이 없을 때는 마치 우리나라의 신파극처럼 입에서 입에서 전해왔다라고 본다. 여기서 이 주문을 진언(眞言)이라고도 한다. 이는 '참된 말'. 거짓이 가미 안된... 이와는 비교할 경, 글, 문장이 없다는 뜻의 '
이는 '참된 말'. 거짓이 가미 안된... 이와는 비교할 경, 글, 문장이 없다는 뜻의 '無等等呪'이다.
비교불가한! 즉, 최상(最上)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를 알면, 깨달으면 최상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논리가 아닌가 한다. 전라도의 무등산(無等山)은 주변에 이롸 견줄만한 산이 없다의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리라...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이러한 위대한 가르침의 주뭄을 외우는 사람에게는 모든 고(苦),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이제 반야바라밀다주를 말하리라.
이 반야심경의 도입부에 도일체고액(到一切苦厄)으로 시작이 되었고, 그 말미를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로 끝을 맺는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처음에는 '관세음보살'의 경지로 시작되지만 결구(結句)는 모든 보살, 지혜의 완성을 추구하는 모든 보살들의 삶의 문제로 귀착이 된다. 즉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이 반야심경을 이해하고 주문을 독송하면 일체의 고(苦)가 제거된다는 의미이다! 즉, 진실불허(眞實不虛)이다!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薩婆訶
마지막으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하노니. 그 주문은 다음과 같이 설(說)하여 집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 사바하"이다고... 여기서 한자들은 음역으로 된 것이어서 본래의 한자의 뜻과는 많이 다름을 독자님들은 아셔야 한다.
" 건너가는 이여! 건너가는 이여! 저 언덕으로 가는 이여! 저 피안의 언덕으로 완전히 도달하는 이여! 깨달음이여! 영원하여라!"
원음으로는 "가떼가떼 빠라가떼 빠라쌍가떼 보드히 스바하(gate gate parasamgate bodhi svaha)"이다.
이제 이 반야심경에 대한 소생의 강론을 마친다. 아무쪼록 소생이나 독자제현이나 인생이라는 배를 타고 출생에서 무덤까지 가는 운명들이니, 이 세상에서 호흡하면서 사는 동안 좀 더 높고 깊은 사유의 세계를 둘러봄이 얼마나 복이 되는지를 이 지혜의 주문. 심경이 말을 해 준다고 생각하오니... 부디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종교나 종파를 떠나서 지혜자의 길을 걸어가 보소서!
2023. 8. 22. 음 칠월 칠일로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에.
청산산방에서 . 지행선사. 소천.司藝. 권용만 교수 글 쓰다.

이 글은 게속되어 지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