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 영웅! 홍범도 장군(洪範圖 將軍) 드디어 귀국(歸國)하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파란만장의 삶을 사시다가... 저 카자흐스탄 이국 땅 차디찬 음택을 당신의 조국의 후손들이 당신의 고향으로 모셔 오나이다!
홍범도 장군님!
이 나라 오천만 인 중에서 "누가 이 장군님을 모르시나요?"
이 산천이 그 용맹함을 다 알고, 이 강물이 그 이름을 외우고 있소이다!
2021. 8. 15. 광복절에, 大韓民國 民族의 英雄 洪範圖 將軍 歸國 하시다 !
Kazakhstan! 그 이름도 익숙하지 않은 중앙아시아의 흑해를 안고 앉은 나라!
그 나라의 남부의 '키질 노르다'의 공동묘지에서 민족의 영웅이 조국의 품에 안기신 날!
2021. 8. 18. 오전 10시...
대전 국립현충원은 잠시 그 시간을 멈추고, 공중의 새들도 읍하고,
이 땅의 후손인 소생은 가슴을 여미고 조용한 울음을 울었다!

2021. 8. 15. 조국 광복! 76년 만에 조국의 품에 안기시는 홍범도 장군님!
2021. 8. 18. 10시 대전 국립현충원에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시다!
전 국민 차렷! 경례! 이제 마음 놓으시고 당신 집에서 평안히 영면하오소서!
홍범도 장군님(洪範圖 將軍)!

이 나라 오천만 인 중에서 "누가 이 장군님을 모르시나요?"
이 산천이 그 용맹함을 다 알고, 이 강물이 그 이름을 외우고 있소이다!
2021. 8. 15. 광복절에, 大韓民國 民族의 英雄 洪範圖 將軍 歸國하시다.
Kazakhstan! 그 이름도 익숙하지 않은 중앙아시아의 흑해를 안고 앉은 나라!
그 나라의 주도 '키질 노르다'의 차가운 거리에서... 조국의 광복 76년 만에서야!
꿈에도 그리던 님의 땅으로 돌아오심을 이 후손들은 가슴이 벅차 올라 눈물로써 맞이합니다...
2021. 8. 18.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신 민족의 영웅이시며, 이 나라 구국의 성웅이신 장군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돌아와 주시어 영광입니다!
우리 모든 후손들이 이렇게 가슴속으로 외치며 머리 숙입니다!
"대한독립 만세"
님께서는 일찍이, 대한독립군 대장으로서 1919년 12월에 공포한 유고문(諭告文) 중에서,
"천도(天道)가 순환하고 민심이 응합하여야, 아(我) 대한독립을 세계에 선포한 후 상(上)으로 임시정부가 유하야 군국 대사를 주하며, 하(下)로 민중이 단결하여야 만세를 제창할 새 어시호(於是乎) 아(我)의 공전절후(空前絶後)한 독립군이 출동되었도다(…) 당당한 독립군으로 신(身)을 탄연 포우(彈煙砲雨) 중에 투하야 반만년 역사를 광영케 하며, 국토를 회복하여야 자손만대에 행복을 여(與)함이 아(我) 독립군의 목적이오 또한 민족을 위하는 본의라." (이상)
친히 그렇게 하셨지요?
탄연 포우(彈煙砲雨)!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던지시고,
이 민족의 '반만년(半萬年)의 역사(歷史)에 광영(光榮)을 주시려고, 저 왜 놈들에게 빼앗긴 우리 땅을 회복(回復)하시어, 자손만대(子孫萬代)의 행복(幸福)을 주시려고'
님께서는 이 나라의 국모(國母)이신 대한제국의 명성왕후 시해 사건(明聖王后弑害事件)이 저 개만도 못한 일본 놈의 낭인(狼咽 )에 의하여 일어나자, 애국청년(愛國靑年)의 비분강개(悲憤慷慨)함으로 일어 나시어서...國母報讐와 逐滅倭夷! 오직 국모에 대한 원수를 갚고, 이 나라에서 저 원수 왜놈들을 몰아내자는 구국의 일념으로 독립군의 정신을 일깨우셨지요!

(2021년 8월 17일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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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날아 다니는 홍범도’ 여러 곳에서 일본군 격파'
이제! 드디어 대한인의 기개(氣槪)를 불사를 기회가 장군님을 찾아오다!
그 약사(略史)를 살펴보면,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이제야 말로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당시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던 노령 대한 국민의회의 군무부와 상의하여 그 해 8월 마침내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다시 나서게 되었다. 선생은 우선 간도로 가서 그곳에서 독립군 병사들을 추가 모집하여 부대를 확대한 뒤 국내로 진공할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선생은 노령에서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소속 군대의 일부를 인솔하고 그 해 9월 간도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의 부대는 간도 대한 국민회의 재정 지원과 인원 지원을 받아 대한독립군을 편성한 뒤, 본격적으로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다.
초기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에 약 300여 명의 병력, 소총 200여 정과 권총 약 30 정의 화력, 그리고 지휘부는 사령관에 선생, 부사령관에 주건, 참모장에 박경철로 구성되어 있었다. 선생이 지휘한 대한독립군은 1920년 초반 경부터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軍務都督府)와 연합하여 대규모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같은 대한독립군의 활동은 다른 독립군 부대에도 영향을 주어 끊임없이 국내 진공작전이 수행되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경비 강화에도 불구하고 독립군 부대들은 국내 진공작전을 계속 결행하였고, 그 전과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효과적이었다.
독립군의 국내 진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군사 및 경찰력을 대폭 강화했음에도 대대적인 기습을 받게 된 일제는 ‘조선군’ 제19사단 소속 남양 수비대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로 독립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추격군은 삼둔자의 서남방에 매복해 있던 최동진의 군무 도독부 소속 독립군에게 재차 격퇴당하고 말았다. 독립군에 의해 연달아 참패를 당한 일제는 이번에는 약 250명의 병력으로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1920년 6월 7일 봉오동(鳳梧洞)으로 진군해 왔다. 이곳에는 이미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선생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및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이 통합하여 조직한 대한 북로 독군 부군(大韓北路督軍府軍), 그리고 이흥수가 이끄는 대한 신민단이 일본군 침입자들을 맞아 전투를 벌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선생이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일본군 추격대를 유인하여 격파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선생이 이끈 독립군 통합부대가 승전하게 된 요인은 지형을 이용한 전술 구사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독립정신이었다.
1920. 12. 25. 자 독립신문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사살되고 수많은 인원이 중경상을 입었고, 독립군 측은 4명의 전사자에 2명의 중상자만을 내었을 뿐이었다. 독립군의 빈번한 국내 진공 전에 의해 큰 피해를 입게 된 일제는 1920년 8월 소위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 계획’을 작성하고 첫 단계로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일제는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1920년 10월 2일 훈춘의 민가와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 13명의 일본인과 한국인 순사 1명을 살해하고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일제는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중국 측에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들 자신이 직접 병력을 투입하여 마적단을 토벌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중국 측의 답변이 있기도 전에 일제는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청산리 전투에서 승전 후 기념사진)
독립군의 항전 사상 가장 빛나는 승첩인 청산리대첩은 이 같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훈춘사건’이 있기 이전에 독립군 측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을 이미 간파하였다. 그리하여 독립군 부대들은 근거지에서 대규모의 일본군과 정면 승부할 경우 본영은 물론이고 간도지역의 한인들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백두 산록 서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 10월 20일 선생의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북로군정서, 대한 신민단, 국민회군 등의 독립군 부대는 백두 산록으로 향하는 길목인 화룡현 2 도구(道溝)와 3 도구에 집결하게 되었다. 독립군의 이러한 동태를 첩보원의 보고에 의해 파악한 일제는 침략군의 일부를 2, 3도구 방면으로 진입시켜 독립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따라서 독립군과 일본군은 이곳에서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전투가 일어난 지역은 한인 마을이 있던 청산리 일대였다. 첫 전투는 3 도구 방면에서 포진하고 있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일본군 야마다(山田) 토벌대 간에 10월 21일 오전 8시경부터 전개된 백운평 전투였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독립군은 일본군을 백운평 골짜기 깊숙이 유인하여 섬멸함으로써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선생이 사령관으로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2 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일본군에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선생이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와 북로군정서는 합동으로 10월 26일까지 천수평, 어랑촌, 맹개 골 만기 구, 천보산, 고동 하곡 등지에서 일본군과 10여 회의 격전을 치렀다. 이들 전투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의 전과 및 피해는 자료마다 서로 다르지만 임시정부가 조사하여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의 전사자는 1,200여 명에 부상자는 2,100여 명이었고, 독립군 측은 전사자 130여 명, 부상자 220여 명뿐이었다. 일당 열 명을 해치운 놀라운 전승이었다!
일본군 놈들이 자다가도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난다는 두 영웅의 이름!
백두산의 두 마리의 백호(白虎)!

김좌진(金佐鎭) 장군과 홍범도(洪範圖) 장군!
이제 저희는 위대하신 두 분의 영전에 삼가 참배를 올립니다!
홍범도 장군님!
님께서는 1868년 평양성.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시어, 태어난 지 7 일 만에 어머니 잃으시고, 동네 아낙네의 젖동냥으로 자랐으나, 그나마도 9 세에 아버님도 여의시고 천애(天涯)의 고아(孤兒)가 되셨지요!
남의 집 머슴살이, 사냥꾼, 건설잡부 등등..
그러나, 님께서는 15세 평양 감영(監營)의 나팔수로 입대하여... 파란만장(波瀾萬丈)의 세월을 견디시고, 민족의 봉화(烽火)로 올 리우 셨으니 그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어 이 후손들은 경배(敬拜) 하나이다!
그날에 가족을 잃으시고, 차디찬 벌판의 땅인 연해주에 계시다가,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령(强制移住令)에 내밀리시어 살길 찾아 찾아간 이 키질 노르다가 님의 묘소가 될 줄이야!
그러나 오늘에 님의 나라 "대한민국'에 귀환(歸還)하셨으니...
이제 천상의 평화의 그곳에서 저희 후손들이 지혜가 부족할 때에,
바른 길로 인도하여주시옵고, 길을 잃지 아니하도록 살펴주시옵고,
이 나라 대한이 사람이 사는 참 좋은 나라 되게 축복하여 주옵소서!
장군님!
이 나라 이 민족을 다시금 돌아보시사 제2의 민중 중흥의 역사가 일어나 동방의 예의지국이 회복되게 도와주소서!

(2021. 8. 18. 오전 10시. 대전 국립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영면하시다!)
白面書生 소천이 삼가 이 글을 홍범도 장군님 영전(靈前)에 드립니다.
이제는 머나먼 이국(異國) 땅. 카자흐스탄 '키질 노르다'의 공동묘지 묘역에서 이제 조국의 품에 안 기우셨으니,
부디 영면(永眠)하시옵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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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없으면 상갓집 개 보다 못하다. 몽골리아 힌티 아이막 황량한 들판의
겔 지붕의 대한민국 태극기를 보고 목놓아 울어 버린 필자

(청산면 종현산 기슭의 필자의 집 앞 영평교에서 청산 거사 소천 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