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이란 무엇인가?
하늘에서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길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괴롭고 몸을 수고롭게 만들고 일들을 어긋나고 틀어지게 만든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인내심을 기르게 하고, 어려운 일을 더 많이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서다. 따라서 사람은 어려움 속에서도 크게 될 수 있으며 도리어 안락 속에서는 쉽게 타락하여 실패할 수도 있다. (맹자님 말씀)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것을 '성(性)'이라 한다!
천지의 명한 바에 순응하라! 그것이 바른 길. 도(道)이니라!
그 도를 따라서 수양하는 것이 가르침. 교(敎)이다!
그러므로 가르침은 곧 자신을 참 진리의 '도(道)'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곧 우주의 축소판(Little Universe)이라는 위대한 사실을 알아서 깨우칠 때에 비로소 그 가치를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소생은 아호를 소천 (Little Universe)라고 하였다. 이 위대한 한 생명이 우주를 닮지 않았으면 그 무엇을 닮았을 것인가
고로 나 자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우주 그 이상의 것이라도 나 자신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
그 우주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 열심히 '중용'의 '도'를 따라 가보자!
중용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고전의 몇 가지 금언(金言)들을 생각하여 본다!
사람에게 있어서 시련은 성공의 예고편과도 같다. 시련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이 되고 진부한 말이지만,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라고 한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대 지도자인 모세도 40여 년간 황야에서 고통과 시련을 겪었으며, 주나라의 강태공도 반세기를 가난과 고통의 세월로 보내다가 마침내 위수에서 무왕을 만나매 비로소 하늘이 내리는 큰일을 맡게 되었다. 대기만성이라 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하늘은 큰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만큼의 시련을 주는 것 같다. 아우구스 티누스는 "지금 당신을 괴롭히고 실패하게 하는 일들은 더 큰일을 하기 위한 하나의 시련이라고 생각하라. 쇠는 달구어야 굳어지는 법이다. 지금 당신의 시련도 그것을 통하여 더 큰일을 맡기려는 하늘의 배려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련과 큰일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중에서도 맹자의 가르침은 가장 아름다운 명문으로 인간의 마음을 감동케 하고 있다.
영국의 석학 Anold Toynbee는 '동양'을 극찬하였다! 인도의 시성 Tagore는 우리나라를 가리켜 '동방의 등불'이라고 우리를 극찬하였는데, 그것이 오늘날에 비로소 현실로 드러나지를 아니하는가!
아마도 한 국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시아 대륙의 극동의 조그마한 나라, 대한민국이 역사의 수레를 돌리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외침(外侵)과 굴욕(屈辱)의 날들을 견디면서도 홍익인간의 단군님의 이념을 버리지 않고, '은근과 끈기'로 세계 역사에 한 장(章)을 이바지하여 오고 있다. 우리도 이제는 이 지구상의 수많은 나라 중에서 우뚝 히 설 준비가 되어 있는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질 않았던가! 동방의 등불이 드디어 이제는 그 빛을 발하여 섬나라의 제국주의 침략근성을 도려내고, 나아가서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여 동북공정이라는 맹랑한 짓을 자행하는 저 북방의 무지한 민족을 능가할 자리에 나아가야 한다!
(인도의 위대한 詩聖. Rabindranath Tagore)
등촉(燈燭)의 심지에 기름이 충분히 젖을 때까지는 불이 붙지를 않는 법! 이제야 이 민족의 등불에 불이 붙어 세계를 향한 거대한 표호(豹虎)를 열고, 이 백의민족의 찬란한 문화의 물줄기는 5대양 6대 주를 향하여 도도히 흐르고 있다. 이 아니 자랑스러운 일인가! 단군성조의 나라! 조선의 개국이래 이다지도 흥왕 한 시대가 없었으니 이 모든 것은 민초(民草)들의 피와 땀의 결실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 민족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등불의 심지가 기름으로 충분히 젖을 때까지는 너무나 많은 고난과 눈물과 피와 땀을 흘려야 해야 했다. 구한말의 정신 못 차린 선조들 덕분에 나라를 통째로 왜놈들 아가리에 넣어 주고 36년의 이 쪽발이 놈들에게 압제와 수탈과 민족의 혼 마저 팔아버린 암울한 시대를 거치자마자, 김성주라는 대가리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의 야욕에 동족상잔이라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피의 잔치를 벌여왔고, 보리고개를 면치 못하던 시절에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이 민족은... 국민소득 80 달러 시대에 단발머리 소녀들의 고사리 손으로 만들어 내던 가발과 속눈썹으로 이 나라가 먹고살았고,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피의 대가로 국방산업의 기틀을 마련했고, 리비아 열사의 나라의 수로관 안에 쏟아부은 이 국민의 피와 땀으로 조선소를 만들고, 제철공장의 쇳물이 흘렀고, 한반도의 반쪽을 내리 달리는 고속도로도 놓였고, 독일의 지하막장의 탄광과 치매노인 요양병원에서 저들이 기피하는 중환자의 대소변을 받아내셨던 파독 간호사님들! 의지의 한국인들이 이루어 낸 피와 땀의 결정체가 '동방의 등불'의 기름이 되어 오늘까지 면면히 타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우리가 한 세기 동안에 달려온 너무나 숨 가쁘고 빨랐던 민족의 부흥 대역사 속에서 다시금 뒤를 돌아보고 발걸음을 가지런히 하고 이 동방의 등불이 전 세계에 비추어져 어두움을 몰아내기까지 새로운 정진의 디딤돌을 밟고 서야 하기에... 이 지금의 도덕성이 점점 쇠퇴하는 작금에 우리가 돌아보고, 다시 새롭게 나아갈 방향을 바라볼 때, 사상의 무장을 해야 할 시기이다. 아니,
더욱 새로운 '정신 재무장(Rearmament of Sprit)'이 너무나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 와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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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천손들이여 이제 다시 잠에서 깨어라! 그리고 날아오르라!
그래서 동방의 등불인 그대들이 전 세계를 밝히는 타는 등불이 되어라! 이제 그리고 무릇 새 학문을 공부하여 배우라! 그 새로운 학문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공자님의 유학이니라. 유학은 무엇인가? 삶의 참다운 의미를 묻는 학문이다. 유학하면 세세한 인간 행동을 규율하는 또 낡아빠진 규정으로 '예'를 숭상하는 것으로 대충들 알고 있지만, 참 유학의 도는 그것이 절대로 아니다. 이런 것들은 유학 공부의 핵심(Core)이 아니고 파생적인 보이는 것들일 뿐이다. 향교에서 공자님을 위한 초하루 보름의 향배가 아니다. 그저 '나는 유생이요'라고 하는 사람 무리들의 타성적인 행위들이다. 유학의 진정한 질문은 바로,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현실적인 응답(Response)이다. 자신의 진정한 철학인 삶의 방향을 제대로 알고서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행위가 바로 '중용의 실천'이라!
자 이제부터 이 길. 사람이 걸어가야 하야할 길. '중용지도(中庸之道)'을 찾아서 여행을 떠나자!
(중용 제23장의 말씀과 해석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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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우리가 왜? 이 시대에 '중용(中庸)을 배우고자 하는가?
그 이유는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하기 위하여!
독자들은 지금의 자신이 남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는가?
남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아니 그 이전에 자신에게 먼저 감동이 있는 삶을 살아가시려면 이 중용을 보고 듣고 익혀서 행동으로 옮겨 보심이 어떠하신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중용(中庸. Moderation)이 무엇인가?
중니(仲尼 : 공자님의 字)가 말했다. "된 사람'(君子)'은 중용대로 하고, 덜된 사람(小人輩) 은 중용을 어긴다.
된 사람의 중용은 된 사람이기에 때에 맞춰 올바로 행함이요, 덜된 사람이 중용을 어김은 덜된 사람이기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중용'의 뜻은 '일상의 변함없는 삶에서 제 갈 길을 바로 간다'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제 갈 길을 바로 간다'에서 '바로'를 일반적으로는 '치우침이 없고 기울어짐이 없는 것, 불편 불의(不偏不倚), 또는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없는 것, 무 과불급(無過不及)'이라고 설명한다. 덜된 사람(小人)과 된 사람(君子)의 차이는 그 삶이 '중용'이냐? 아니냐? 에 있다. 덜된 사람은 사는 데 있어서 치우치거나 기울어짐과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있다. 그것을 바로잡으면 된 사람이 된다.
된 사람과 덜된 사람(史覽)으로 분류하여 봄이 마땅한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들은 흔히 말하기를 "아. 덜된 놈. 못된 놈"이라고 말한다. 사람이란 한자어(진서)로 보면 '역사를 보는 자'로 의미 해석이 된다. 역사란 무엇이며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란 한 지역이나 한 시대나 나아가 전 세계와 우주의 태초부터 지금까지의 전인류가 지나온 삶의 형태와 형상, 그리고 사상과 학문과 이론의 총체를 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닌 존재를 "사람"이라고 한다. 당신은 사람인가요? 그러하오이다. 그러면 사람이면 '된 사람' 인가요? 아니면 '덜된, 못된 사람' 인가요? 眞人이신가? 아니면 假人이신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되고 덜됨은 그 사람의 인기과 품행의 정도를 이르는 말이니, 그 형상이 바르게 서있는 가를 이름이다. 비뚤어짐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치우치거나 기울어짐, 그리고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바로 그 점이 덜된 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철부지가 봄이 왔는데도 겨울옷을 그대로 입겠다든지, 여름이 아직 멀었는데도 여름옷을 입겠다고 떼를 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철부지는 철의 바뀜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제철에 맞도록 옷을 갈아입을 줄도 모르고 떼를 쓴다. 그러니 철부지가 떼를 쓰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고 문제는 철을 모르는 데 있으므로 철이 들도록 하면 공연히 떼를 쓰는 것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있어서도 다를 것이 없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내가 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서 '나를 다함(盡己)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앞에서 누누이 이야기한 대로 '나를 다함'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순간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상에는 비록 성인이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고 비록 성인이라도 행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또, 잘 생각해 보니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정말 있다'라고 알게 되면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게 된다.
'나를 다함(盡己)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해졌다면 이제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말자.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어떤 이는 나면서 알고, 어떤 이는 배워서 알고, 어떤 이는 큰 어려움을 치르고서 아나, 그 앎에 이르러서는 하나이다. 어떤 이는 편안하게 행하고, 어떤 이는 바라는 바가 있어서 행하고, 어떤 이는 마지못해서 억지로 행하나 그 공을 이룸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할 일을 함은 선을 가려내서 굳게 지킴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삼가 생각하고, 밝게 가르고, 두텁게 행한다. 아예 배우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배우게 되면 능해지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고, 묻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물으면 알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생각할 바에는 얻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고, 가르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가르기로 하면 밝지 않음이 있으면 그만두지 않고, 행하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행하게 되면 두텁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는다. 남이 한 번에 능하면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능하면 나는 천 번이라도 한다. 마침내 이렇게 해내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밝아질 것이고, 비록 여린 사람이라도 반드시 꿋꿋해질 것이다.
이제 중용(中庸)에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길(道)에 대해 하나씩 탐구하여 봅시다.
도(道)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천지(Universe)가 명하는 바를 바로 행하는 법이요, 그 명함이 곧 천기이다. 그 천지의 기운이 동하여 하나의 큰 법을 만들고 그 법 안에서 천지의 리수(理修)와 도수(度數)를 바라보고 실행하는 것이 '도(道)'이다'라고 소생은 말하고 싶다. 그래서 도를 지킨다는 것은 '사람이 행하여야 할 최소한의 규법'이라고 할 것이다.
(온 우주. Whole Universe. 는 무엇인가? 나는 작은 우주. Little Universe가 아닌가요?)
중용이란 무엇인가? 오늘도 그 의미를 좇아서 길을 간다!
그 답을 찾아서 오늘도 철학을 하여보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지금 당신을 괴롭히고 실패하게 하는 일들은 더 큰 일을 하기 위한 하나의 시련이라고 생각하라. 쇠는 달구어야 강해 지는 법이다. 지금을 통하여 하늘은 당신에게 더 큰 일을 맡길 것이다"
모든 사물의 이치는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 오늘도 매사를 꾸준히 반성하며 당신께서 하시는 일마다 성심을 다하라! 이러하신 맹자의 가르침이 곧 '중용'이다. 공자가 이르시기를 ' 만일 사람의 말에 성실과 신의가 없고 그 행실에 돈독(敦篤)함과 정성이 없다면 이 세상에 이루어질 일이 하나도 없으리라"라고 하셨다. 이 말은 인(仁)은 곧 학덕(學德)이요, 학덕은 '성심(誠心)'이며, 성심은 곧 '정성(精誠)'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보이는 모든 일에 사람의 참 정성이 들어갔으면 한다. 정치, 경제와 문화, 종교의 가르침을 행하는 자들의 가슴속에 이 두 글자가 깊이 박혀서 '진정한 철학'이 있으면 이 나라의 내일은 보다 더 좋은 날이 되리라! 배움이 있는 자들의 행동철학(行動哲學)이 반드시 '정성을 들여서 일하는 마음'이 이 시대와 국가와 국민을 살릴 것이다.
말은 풍성하고 그럴듯하지만, '지행합일(知行合一)이 되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문제만 일으킨다. 일언 삼사(一言三思)라고 한다. 한 마디의 말을 할 때에 적어도 세 번은 생각하여 말하라는 뜻이니... 삼가 자신의 혀를 절제하고 '말의 씨'(말의 씀)를 심는 자는 큰 허물을 피하느니라...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지'를 설파하고 '지행합일'을 실천의 덕목으로 가르쳤다. 대학의 교양과목 시간에 이를 배웠으면 실천함이 마땅하지를 않은가! 그런데 이는 남의 이야기라고들 한다.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란다. "나는 배울만큼 배웠고 살 만큼 살았으니"라고 한다. So what! 그래서 뭐 어떠하다는 것인가? 정중히 부탁드려 말한다면, '지금의 니 꼬락서니를 아세요! 다시 말하여 '중용'을 배우라는 부탁의 말씀이다... 당신의 '지식의 짧은 토막 상식으로 세상을 다 아는 체하지 말라'는 것이다. 특히 교육과 정치를 하시는 분들이 좀 이러한 깨달음이 있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이 올 시다. '깨달음이란, 깨어져야만 도달한다'는 말이다. 당신은 깨어져 있는가? 아니면 깨어져 보려고 한 적도 없는가?
줄탁동시(崒琢同時)!
무슨 말인가요? 진리를 구하는 구도자의 참모습이라.
'쪼을 줄. 깨뜨릴 탁'
병아리의 부화과정은 이러하다. 자연의 법칙으로는 어미닭이 알을 품은 지 21일 만에 병아리는 알 안에서 나오려고 열심히 그 딱딱한 껍질을 연약한 부리로 쪼아대고, 어미는 밖에서 그 알을 깨뜨려서 그 병아리의 세상으로의 나옴을 도와준다'는 불교의 용어이다. 참으로 그 뜻이 깊다. 당신께서 배움의 목마름으로 정성된 마음으로 진리를 구도(求道)할 때에 그 어디선가에서 당신을 도와줄 지혜의 말씀과 그리고 그에 합당한 시간과 장소가 당신 앞에 열리리라! 목마른 자가 샘을 파라 했으나 그 샘을 파면 반드시 물을 얻을 수가 있음이라. 이것 또한 중용의 지혜이다. 자아의 무지한 벽을 깨뜨리고 나온 자만이 세상을 볼 수 있다. 알 안에 머물러서는 결코 바깥세상을 볼 수가 없음이라! 알 속의 생명체가 그 알의 껍질을 스스로 깨고 나오면 병아리가 되지만, 사람이 깨뜨리면 Egg Fry로 식탁의 반찬으로... 그래요! 스스로 깨어 나온 생명체는 '알'에서 ' 병아리' '병아리'에서 '닭'으로 자라나게 되지요! 즉 이름이 바뀌어진다는 뜻! 조그만 자아 속에 서서 상식 정도의 알고 있는 것들. 고집과 아집의 틀. 타협하지 못하는 내면의 껍질. 존중과 배려심 없는 나 잘난 체의 마치 심앙과도 같은 것들을 스스로 깨고 나오시란 말이요. 한데 그것의 그렇게 어려우니... 중용을 잘 알고 실천하면 어느 날에는 이 줄탁동시의 아픔과 기쁨이 당신에게 임하시리니!
여기서 하나 더 공부하시고 가자고요!
닭에 대한 공부 라오.
계(鷄)! 닭의 다섯 가지의 덕(德)은
문. 무. 용. 인. 신(文. 武 勇. 仁. 信)이라 하였다.
닭의 머리에 붉은 벼슬의 문관의 관(文官의 冠)과, 날카로운 발톱의 무(武), 적과 사력을 다하여 싸우는 용기(勇氣), 먹이를 혼자 먹지 않고, 동료나 새끼들을 불러서 같이 나누어 먹는 너그러움의 인(仁), 밤을 새우고 새벽마다 시각을 알리는 신의(信義)!
이 다섯 가지의 덕목만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중용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일 것이다.
병아리의 탄생을 통해서도 오늘 많은 것을 깨달아 본다.
사람을 진서(漢字)로는 '역사를 아는 자'로 '史覽'이라고 쓴다. '역사'란 학문과 진리를 포함한 '인간 삶의 총체'를 이른다. 이것을 보는 해안(解顔)이 있는 자를 가리켜 '사람'이라 한다. 당신은 그냥 사람인가? 나아가 '중용'을 아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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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이란 무엇인가? 오늘도 그 의미를 좇아서 길을 간다!
그 답을 찾아서 오늘도 철학을 하여보자!
중용에서 ‘中’이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 ‘庸’이란 평상(平常)을 뜻한다. 인간의 본성은 천부적(天賦的)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본성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본성을 좇아 행동하는 것이 인간의 도(道)이며, 도를 닦기 위해서는 궁리(窮理)가 필요하다. 이 궁리를 교(敎)라고 한다. '중용'은 요컨대 이 궁리를 연구한 책이다. 즉 인간의 본성은 한마디로 말해서 성(誠)일진대, 사람은 어떻게 하여 이 성(誠)으로 돌아가는가를 규명하여 준다.
이는 다시 말하여서 신중한 실행이나 실천을 뜻한다. 이 사상은 중국 외에도 인도와 서양에서는 그리스의 플라톤(Platon) 또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 의하여 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즉, 플라톤은 어디에서 그치는지를 알아 거기서 머무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며 따라서 크기의 양적 측정이 아닌 모든 가치의 질적인 비교를 중용이라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마땅한 정도를 초과하거나 미달하는 것은 악덕이며, 그 중간을 찾는 것을 참다운 덕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불교의 중도(中道)도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교사상에 있어서 중용이란 현실에 적용되는 행도(行道)의 최선의 길을 뜻하며, 형이상학적인 개념에서 출발하여 가치론적인 수양 방법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 중용'의 핵심사상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전체의 핵심이며 상대가치 개념의 중간인 중(中)을 인식하여 그로써 실행하는 사상인 것이다. 중용을 분석해 보면, 중은 양극(兩極)의 합일점이고, 용은 영원한 상용성(常用性), 즉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정이(程頤)는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이라 한다(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곧 중은 공간적으로 양쪽 끝 어느 곳에도 편향하지 않는 것인 데 비하여, 용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주희는 중용을 주석하기를, “중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대어 있지 않아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으로서 인성(人性)이 지극히 중정(中正)하여 질서를 이룬 안정된 상태가 사물에 접하여 감이동(感而動)하기 이전의 인성 본연(人性本然)을 나타내는 말이며, 용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평상(平常)됨을 나타내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중용의 참된 뜻과 그 실현은 중과 용, 즉 알맞음과 꾸준함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치우치거나 기대어 있지도 않고 지나치거나 모자람도 없는 중덕(中德)뿐만 아니라, 꾸준한 용덕(庸德)을 겸비하여야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겠다.
또한, 유교의 교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용의 의의는 '지행(知行)의 덕'을 존중하고 있다.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도가 행하여지지 못하는 까닭을 내가 알겠도다. 지자(知者)는 지나치고 우자(愚者)는 미치지 못하는구나. 도가 밝혀지지 못하는 까닭을 내가 알겠도다. 현자(賢者)는 지나치고 불초자(不肖者)는 미치지 못하는구나(중용 제4장). 라 했다.
또 '중용은 지요(至要) 한 것이나 인간들은 그것을 능히 행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이다.'라고 하여, 중용의 도는지와 행의 상호조화 내지는 상보적인 관계 속에서 실천될 수 있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또,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여 말하기를, “군자는 중용을 체하아(體行)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反)한다. 군자가 체 행하는 중용은 군자로서 시중(時中)함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함은 소인으로서 거리낌이 없음이다(중용 제2장).”라고 하여 군자의 중용은 때에 따라 알맞게 도를 행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중용사상의 본체론적·심성론적 논리 전개를 살펴보면, 우선 주자의 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주희는 '주자어류 (朱子語類)에서, 성정(性情)에 대해서는 중화(中和)를 말하여 중을 도의 체(體), 화를 도의 용(用)으로 보았고, 또 이의(理義)에 대해서는 중용을 말하여 중은 천하의 정도로서 용(用)으로 보아 시중의 중으로 보았다. 용은 천하의 정리로서 체로 보고 있다.
또, 중화와 중용을 비교함에 있어서는 중화는 체, 중용은 용(用)이라 하였는데, 이는 결국 중화는 성정으로 심성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중용은 그것이 행위로 드러난 것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겠다.
현대과학과 철학의 편중된 진리관에 반하여, 유교사상은 객관적인 자연에 대한 인식과 주관적인 인간이 하는 실용의 ‘중용’을 진리로 하기 때문에 새로운 방향 제시를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진리는 단순한 객관적 세계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순전한 주관적 세계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용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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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의 제1장(天命章)의 첫 문단!
천명지 위성(天命之謂性), 솔성 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 지위교(修道之謂敎).
이 짧은 구절은 유교의 기획을 '하나의 명제로 선포한 강령'(綱領)에 해당한다. 사실, 공자의 '논어'는 공자의 행적과 교훈들을 단편적으로 모아 놓은 잠언집에 가깝다. 그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우리는 도대체 공자가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지 전체적 그림을 그리기 막막하다. '중용' 첫머리의 선언은 바로 그 산만한 교훈과 일화에 그야말로 일이관지(一以貫之), 중심과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하늘에서 명(命)함이 곧 성(性)이요, 그에 따르는 것이 도(道)이며, 도를 완성하는 것이 곧 교(敎)이다"
천명지 위성(天命之謂性)!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 곧 성(性)이다.
여기서 성의 의미는 "진정한 인간성'을 말한다. 어떠한 동물적 분류나 Gender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솔성 위지도(率性之謂道)는 인간은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자각하고 그것이 지시하는 목표를 향하여 자신의 모든 역량 즉, 내면의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하여야 하는 존재임을 일깨워준다. 수도 지위교(修道之謂敎)는 "도를 닦는 것'이 곧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통틀어서 보면, '인간성의 실현'을 그 핵심(Core)으로 하고 있다. 모든 학문의 완성은 이 말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일생을 통하여 공부하고 학문을 연마하여 그 최종적인 목표가 먹고사는 일에 달려있다면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맹자와 동시대의 사상가인 고자(告子)는 '태어남', 즉 출생이 곧 성이다'라고 하였으며, 주자가 말씀하시기를 " 성은 인. 의. 예. 지. 신(仁義禮智信)의 다섯 가지의 덕(德)을 말한다"라고 하셨다. 또한 맹자는 성의 대표적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는 결코 후천적인 것이 아니며 태어나면서 가지고 온 것'이라 하였다. 이 모두의 사상들은 중요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인생이란 하늘에서 명한 것'이다는 논리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볼 명제이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먹고살고 출세하고 부자 되고 훌륭한 자식 만들고...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군상(群像)들이 아닌가 싶다. 좀 멈추어서 서서 하늘을 한 번 바라보자! 그래도 '나와 당신 자신은 하늘의 명을 받고 이 땅에 태어난 자'라는 자부심 한 번 가져 보세요!
그래서 우리들을 가리켜 ' 하늘의 자손 ' 즉 천손(天孫)이라고 부른다. (소생의 다른 칼럼. '깨어라, 일어나라, 날아라'를 보셔요) 이 얼마나 가슴이 벅차고 뿌듯한 말인가요! 그래서 우리 대한인은 하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 비록 크게 출세하지 못한 '갑남을녀(甲男乙女)'요 '필부필부(匹夫匹婦)'이지만, 비록 많은 것 가지지 않은 '빈한(貧寒)한 삶'이지만, 그러하여도 유유자적하며, 안빈낙도를 즐기며, 비록 공맹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몰라도 자신을 위한 '가치 있고 참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오늘 이 시간처럼 철학(깊은 생각과 사고하는 것이 철학)하시면 살아 보아요!
솔성 지위도(率性之謂道)!
하늘의 명으로 태어난 우리들이 '인. 의. 예. 지. 신(仁義禮智信)'을 덕목으로 삼아서 그 하늘의 이치를 실현함을 말한다!
오늘날에는 교육이라는 것이 그 목표를 어디에 두는지 잘 모르겠다. 참된 인간을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암송하는 기계나 흉내 내는 원숭이'를 만들자는 것인지 도무지 알지를 못하겠다. 어려서부터 SKY 대학에 가는 것이 철부지 부모들의 한심한 욕심이니 이 일을 어찌하랴! '인(仁)과 예(禮)'를 물으면 그것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 한다. "지(智)'를 물으면 공부한 적이 없단다. 의(義)와 신(信)을 물으면 한다는 말 "요즘 세상에 의리 지키고 신의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정말로 맞는 말씀들이다. 그 책임은 조금 앞서 한 세대를 산 소생들에게 있으니...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좀 깨어서 일어나고 그리고 천손답게 비상하여 보자는 말이지요! 우리의 본성을 갈고닦아서 진정한 바르고 밝은 길, 즉 도(道)를 실현하여 봅시다. 그 도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 도가 곧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실천이라는 말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며, 이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며, 더 나아가 세계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마음으로 매일을 성실하게 사는 것! 이것이 오늘날의 곧 도, '사람 사는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도 위지교(修道之謂敎)!
'도(道)'를 완성하기 위하여 '교(敎)가 있으며, '도(道)'에 근거하여 그 실천 수단으로써 가르침 즉, '교(敎)''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르침'이라는 뜻의 '교(敎)'는 '배움'이라는 단어 '학(學)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두 단어는 서로 보완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이 가르침, 즉 교육이라는 것이 없다면 이 세상은 참으로 가관(可觀) 일 것입니다. 하물며 이 교육이 있음에도 요즈음의 세상은 정말로 볼 만합니다. Mass media를 통하여 전해주는 소식들이 정말로 이 땅이, 이 우주가, 이 인간들이, 아니 우리 대한인들이 이렇게 비인간적이며 비도덕적으로 타락하였는가? 어떻게 유아원에서 21개월 된 아기가 잠을 안 잔다고 원장이라는 년이 다리로 눌러 질식사를 시킨다는 말입니까? 입양한 3살짜리 여아를 목욕탕에서 물고문을 하여 죽인다는 말이요! 정말로 하늘이 무섭지를 않소이까? 이 악랄한 족속들이여! 그대들을 향하여 천손이라 하겠는가? 대한인의 가슴을 울리는 참 가르침이 없는 세상이 만들어낸 당연한 결과이다. 돈만 되면 사람의 목숨은 생각하지를 않는 파렴치한들이여! 그대들은 어디서 온 괴물들인가? 제 부모를 살해하고 형제를 돈으로 팔아먹는 이 세상에 무슨 '중용'을 다 공부하냐고?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가르치고 교육하는 '길러냄'을 멈출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필자도 매일매일 밤을 밝히면서 애를 쓴답니다. 인류문명의 가장 큰 역할은 말과 글이 있어 이 '교'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프리카 밀림 속의 '유인원'인 고릴라의 생활을 보면, 그들은 글자 없이도 몸짓으로만 그들의 삶을 조화롭게 사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글과 말이 있는 인간세상의 파렴치한들은 저 고릴라에게 가서 한 10년을 공부하고 와야만 합니다. 왜 전국의 교도소와 구치소가 만원(滿員)인가요? 그 안에는 SKY 출신이 엄청 많다는 사실! 고도의 지식은 있어도 한 줌 지혜가 없는 자들과 이 나라의 진실된 목민관(牧民官)이 아닌 껍데기 지도자들이 높은 지위에 앉아 있는 한, 정부가 바뀌면 아침저녁으로 바뀌어지는 교육제도가 있는 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교육은 모름지기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하였다. 마치 나무 한 그루를 백 년을 내다보고 심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래서 이 중용의 저자는 사람살이의 최고의 가치인 '도'의 실현을 위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글을 통하여 훈육(訓育)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의 천손들이 참으로 지혜로워서 옛 성현들의 말씀을 익히고 실천하여 참다운 '도'를 이루면 이 나라의 명운은 밝아지리라!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이 중용의 도(中庸의 道)를 실천하지 않을 때에 그 사람, 가정, 사회 , 국가는 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필자는 이제 우리 대한 인도 도독의 재무장을 위하여는 나부터 먼저 중용지도(中庸의 道)를 익히고 실천하자고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정이나 학교에서 바른 '인성의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이유 때문에 어른들이 미리 이 도를 익혀서 후대에게 보여주어서 올바로 가르치자는 것이지요. 나 자신부터 깊이 공부하여 옛 성현들의 말씀을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독자 제위께서도 동참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은 총명하시기 때문에...
교육이 왜 필요한 것인가요? 교육(敎育)은 '가르침과 기름'을 의미하는데, 그 내용이 문제이다. 교육의 목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한 사람의 '인격'의 수양이다. 이 인격(人格 )이란 무릇 '사람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도리(道理)이다. 그래서 한 번 세워 놓은 인격도야(人格陶冶)의 방업이 흐트러저서는 아니 된다.
한 가정의 가훈은 많아도 좋아서 모두 다 지키고 이루기만 한다면...
그러나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이니... 향을 싼 봉지는 향 내음을 풍기고 고등어를 싼 봉지는 비린 내음을 풍기는 법!
그러므로 중용은 '사람의 도'일 뿐만 아니라 '하늘의 도'에까지 통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디에나 언제나 존재하는 평범한 것임을 뜻하는 것이 ‘용’이다. 그가 처한 지역 또는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요구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 중용인 것이다. 우리가 정성을 다하여 중용의 도를 깨우친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사는 시대적인 요구를 올바로 이해하고 이에 제대로 대응함을 뜻하게 된다. 이 시대적인 요구에 알맞도록 대응을 잘하는 사람이나 민족이 그 시대의 세계를 이끌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중용'을 통하여 유가 사상의 철학적 기반을 현대적인 입장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는 중용사상의 이해를 통하여 참된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외재적인 도덕의 영역과 내재적인 참된 본성의 법칙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진다. 그의 진실한 자아를 발견하는 데에서 사람들은 우주와 자신과의 화합을 발견하게 된다. 중용의 도는 ‘사람의 도’ 일뿐만 아니라 ‘하늘의 도’이기도 하므로 우주의 섭리와의 화합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사람은 '참된 자아'와 '참된 본성'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중용'은 ‘사서’의 하나로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천여 년 동안 읽혀 온 책이다. 우리 조상들의 사상에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을 책이지만 현대인들은 흔히 중용의 사상을 소극적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중용에의 길인 ‘정성스러움’은 결코 소극적인 태도로써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책자의 첫 장은 그 책 내용의 모든 것을 아울러 나타내는 대표적인 내용이다. 성서의 첫 장의 첫 절인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모든 것의 총칭인 '하나님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earth"고 한다. 이 한 문장이 성경의 구약 39장과 신약 27권의 모든 내용을 포괄적으로 대표하고 있다. 그 키워드(Key Word)인 '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가 성경의 모든 내용을 축약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장만 다 터득하고 참으로 이해하여 깨닫는다면 성경을 다 이해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 중용도 논어도 또한 다른 모든 성현들의 말씀인 책의 모두(冒頭)만 제대로 깨달아서 반드시 실천으로 옮긴다면 그보다도 복된 일이 없다고 감히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또한 그렇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골몰(汨沒)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대한 책들의 모두를 다 알아서 무엇에 쓰리요! 알고도 그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성경은 이런 자들을 가리켜서 '울리는 꾕가리'라 하였다. 우리네 인생에서 선진과 성현들의 금언 중에 단 한 단어라도 그 뜻을 알아 지키고 실천에 옮긴다면 그것이 곧 또한 '중용의 도'라고 할 것이다. 이는 제3장에서 다시금 언급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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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 12. 10. 토)
중용 제2장(時中章)의 첫 문단!
중니 왈, 군자 중용 소인 반중용(仲尼曰 君子中庸 小人反中庸)
이 말씀은 군자는 중용을 실천하나, 소인은 이 '중용의 도'에 반하여, 다시 말하여 어긋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군자의 행동거지는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하여 처신하나, 소인배들은 염치나 체면 내지는 주위의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처신한다는 뜻이다. 사람은 가장 기본적이고 보통의 상식적인 것을 실천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요즘의 시대가 왜 이토록 혼란하고 소란스러운 사회로 되었는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모두가 제 잘 났다고 떠들어대기 때문이다. '중용의 도'를 실천하는 사람이 이 땅에 많으면 많을수록 보다 바람직한 사회와 나라가 될 것이요, 반대로 소인배들이 판치는 사회라면 그 미래는 밝지 못할 것이다. 이 나라도 '중용의 도'를 깊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목민관'들이 많이 나와서 그 본을 보여주는 사회와 국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이 필자의 평생의 소원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하였다. 많이 배웠다고 군자는 아니요, 배움이 적다고 소인은 아니니... '나는 어디에 설 것인가! 독자 자신의 몫임을 명심하소서!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다. '남에게서 대접을 받으려면 미리 대접을 하라'는 성경의 말씀이다. '높아지려면 미리 낮아짐을 배우라'는 교훈을 명심하여야 한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하기를 "오래 살기를 원하다면 중용 위 길을 택하라"라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하기를 "중용은 우리들에게 덕을 성립시키는 행위" 라 하였다. 영어로 '중용'을 표기하면 'Good Sense'라 하겠다. Good의 뜻은 명사적 의미는 '선(善)'. 이는 착함. 도덕적 가치 기준에 맞는 것', 형용사적 의미는 '즐거운, 기쁜, 다행스러운'이다. 여기에 우리가 늘 가지고 생활하는 '감각'이라는 Sense가 첨언되어 'Good Sense'는 '양식(良識)'이라 하여 '어질고 뛰어난 판별력'이라는 뜻이 된다. 즉, '실천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 핵심(Core)이다. 세상의 만사를 대할 때에 미리 '중용의 도'를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행동할지라!
Good Sense! 그러한 고로 '중용을 읽고 공부한 사람'은 반드시 '변화'가 있어야 한다.'일상적 삶의 자기 혁명'이 있어야 한다. 변화는 무엇인가? 가던 길에서 다시 한번 돌아보고 아니면 바로 돌아서는 것이다. La - metanoia(Turn away)이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서 하여야 한다. 그릇되게 말을 하였으면 사과하고 바르게 말해야 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사회적 정의에 반하는 것이면 안 하면 된다. 즉, 자신을 잘 다스려서 참으로 선한 도리들을 실천하는데 이 수양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흔히 당신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참으로 많이 망설여진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이 보통은 그저 맹목적으로 살아오지를 않는가? 가령(假令), '칼'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모두는 잘 '벰'(Cutting)이라고 할 것이다. 이때에 '벰(Cut)'의 기능을 최고로 잘 수행하는 성질을 '칼의 덕'이라고 한다. 이때 '덕(德)'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아레떼(arete)라 한다. 이 뜻은 '탁월함(Distinction)', '훌륭함(Excellence)'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행복(eduaimonia)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천당 가기 위하여 존재한다'든가, '신이나 중개자에 의하여 구원받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후대 서구 기독교의 종말론적 구원론과 그 세계관과는 엄연히 다른 관점이다. 그는 비종교적인 건강함을 추구했다.
자신의 삶 가운데서 군자의 길이냐 소인배의 길이냐는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있다. 고로 자신이 중용의 도를 지켜서 근신하면서 사느냐, 아니면 인간의 오감이 시키고 부르는 데로 따라서 살 것이냐는 이 중용의 말씀을 알고 난 후 자신의 변화를 추구하느냐, 아니면 그저 그런대로 살아갈 것인가는 자신이 선을 행하여 복된 삶을 살 것이냐, 불선 행하여 화를 부를 것이냐 하는 물음과 같음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子曰僞善者는天報之而福하고 爲不善者는天報之而禍니라!
앞서 언급한 인간의 궁극적인 추구, 즉 목적인 행복의 복을 얻기 위하여는 중용의 길로 나아가서 참된 '선(Virtue)'을 행하라는 것이니 제위께서도 이 말씀을 수용하시고 실천하심이 어떠하실는지?
중용 제3장(能久章)의 첫 문단!
'자왈 중용 기지의 호 민 선능구의(子曰 中庸基至矣乎 民鮮能久矣)'라!
"중용이여! 참으로 지극하도다. 아! 사람들이 거의 그 지극한 중용의 덕을 실천하지 못하는구나!"
이 '중용'을 쓴 공자님의 손자 '자사(子思)'는 그의 아버지 '백어(伯漁)가 작고 한 때에 10세의 어린 소년이었고, 당시 공자님의 연세는 69세이셨다. 그 후 4년 뒤에 공자님이 작고한 때에 그는 14세였다. 공자님의 손자인 자사의 학덕은 그 조부를 이어 기원전 4세기의 '천지 합일'의 사상으로 맹자와 더불어 '유심론 사상'의 토대를 이루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덕목의 토대를 강조한 사상가이다.
(꽃이 아름다움은 '時'에 맞추어 '重'을 잘 실행하였음이라!)
여기에서 공자님의 탄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탄(永嘆)의 한숨이시다. 진실로 그러하다. 학문의 도가 아무리 높으면 무슨 소용 이리요! 아무리 학문의 수학기간이 길고 그 경지가 높다고 한들! '그것을 지켜 행하는 사람이 사라진 지가 오래구나'라고 하시며 세상을 향하여 '군자'의 '참 도리'를 행하라고 반어적으로 강조하심이 아닌가? 이 시대에 우리를 향한 경종(警鐘)의 이 말씀은 '이는 요순(堯舜)의 덕치를 따라서 정치하는 사람들은 그 정신을 본받으라는 것이요', 현대의 국민을 대변하여 스스로가 '정치'가로 된 사람들이 어디 '학문의 정도'가 낮은가? 저들이 공부한 것의 학위가 보통 석사 이상, 박사들이지만 여의도에서 일어나는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의 '살아남기'의 설전(舌戰)! 시정잡배들의 폭력과 다를 바 없는 '힘의 논리'들!
만약에 이들이, 아니 소생 자신부터, 삼강오륜(三綱五倫)의 군자가 가야 할 '가르침'을 참으로 알고 실천하려고 한다면 이 난리법석인 세상은 되지 않았으리라... 삼강오륜이 무엇인가? 우선 이 진서(한자어)의 '강(綱)'의 의미를 해석해보자. 이 '강'자는 '벼리 강'이다. 여기서 '벼리'가 무엇인가? 벼리는 '그믈의 위쪽의 코를 묶어 놓은 것'으로서 그물 안에 고기가 아무리 많이 잡혔어도 그물을 끌어올리는 이 '벼리'가 없으면 그물을 당겨 올릴 수가 없다. 무슨 말인가? 이 말은 '글이나 일의 가장 중요한 토대'를 이르는 말이다. 고기가 아무리 많이 잡혔어도, 학문을 수양하고 아는 것이 아무리 많다고 하여도, 이 벼리의 소임을 알지 못하면 만사가 허사라는 것이지요.
원래 삼강오륜 '三綱五倫'
삼강은 군위 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하며 이것은 글자 그대로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오륜(五倫)은 오상(五常) 또는 오전(五典)이라고도 한다. 이는 '맹자(孟子)'에 나오는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 부부유별(夫婦有別) · 장유유서(長幼有序) · 붕우유신(朋友有信)의 다섯 가지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道)는 친애(親愛)에 있으며,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인륜(人倫)의 구별이 있으며,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뜻한다.
삼강오륜은 원래 중국 전한(前漢) 때의 거유(巨儒) 동중서(董仲舒)가 공맹(孔孟)의 교리에 입각하여 삼강오상설(三綱五常說)을 논한 데서 유래되어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과거 오랫동안 사회의 기본적 윤리로 존중되어 왔으며, 지금도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윤리 도덕이다.
필자가 어린 시절에 선친으로부터 종아리 피멍이 들게 맞아가면서 쓰고 외웠던 그 시절의 기본 학문인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을 비롯한 유교사상 책들... 그래도 그 시절은 예의도 있었고, 도덕도 살아있었다. 반세기 만에 서구화 문명에 기들어진 개인주의적 교육방법들이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할 (인. 의. 예. 지)의 개인과 사회의 기본적인 덕목마저도 깨 박살을 내어 버리고 말았으니, 아! 바로 지금의 소생을 포함한 이 시대의 사람들이 깨우쳐 알아야 하고 곧 실천하는 중용의 사람들이 반드시 되어야 한다.
民鮮能久矣!
아! 이것을 지켜 실천하는 백성을 본 적이 너무나 오래구나!
그 시절에 이렇게 탄식하였을진대 하물며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야 말해서 무슨 소용 이리요! 여기서 공자님은 시대에 대한 개탄(慨嘆)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개탄이다. 중용의 귀중한 가르침을 배웠으면 오랫동안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즉, 능구(能久)! '오랫동안 지켜 행하라' 머릿속에 들어서 아는 것과 실천은 엄연히 힘들고 우선은 불편하지만, 그래도 참 군자는 그것을 따라간다.
인생의 목표는 영원이나 불멸이나 불사나 불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저 나약한 인간들의 욕심의 발현일 뿐이다. 이런 어휘들은 그저 종교적인 매너리즘(Mannerism)의 표현일 뿐이다고 필자는 감히 생각한다. 불교의 명언집인 '반야심경'에는 모든 것이 공하고 '시제법공상'이라고 하여, 실상은 그 안에 모든 것이 변하니 그 '원래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없다'는 뜻이다. 우리네 인생에 있어서'영원불변'이라는 진리는 없다고 본다. 다, 모두 다, 이 세상의 있어짐의 모두는 변한다. 성서의 '해 아래서 새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아니 태양도 수십억 년의 세월을 흐르면서 변하고 있고, 남북극의 빙산도 변하여 녹아내린다. 당신의 이름 석자와 글 몇 개로 살아생전에 명성을 얻은들 무슨 소용 이리요? 당신이나 소생이나 죽은 후에는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것이 세상인심이다. 그러함에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기를 알아 달라고 아우성이다. SnS. Face book. etc. 그것은 소생도 마찬가지이다. 불민한 소생이 제 Blog에 글을 써서 독자들과 소통해야 만족을 느끼는 이치이랄까요! 왜냐하면 필담(筆談)을 통하여 얻는 '당신으로부터 배움'의 기쁨은 어느 것과도 견줄 수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그래도 이 모든 자기의 표현의 방식 안에 '중용의 도'를 지켜나가면서 Appeal 하려고 삼가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한 걸음씩 나가 보는 것이지요! 그러하답니다. 희로애락의 삶 속에서 "중용"을 '지속'하는 것처럼 영원한 것은 없다는 의미이지요. 지속은 불변이 아니라 변화의 일종이며, 시간 속에서 유지(Continue)를 의미함이다. 그러면 우리들은 얼마 동안이나? 한 십 년, 아니한 일 년, 아니 단 하루를 '중용' 안에서 지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공자님은 '民鮮能久矣!'라고 하시는 것이다! 중용의 용(庸)의 의미는 범용(凡庸)과 항상(恒常)을 말한다. 'In everything and always'이다. 밤이고 낮이고, 혼자이고 여럿이고 간에 변하지 말고 꾸준히, 그러나 단지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짧은 인새에서 허왕된 진리를 추구하지 말고 구체적인 삶을 지속하라는 교훈이다. 지금은 우리들 모두는 귀를 열고 '중용'을 들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할 그 시대와 시간, 그리고 그 장소이다. '중용'의 교훈이 있는 곳!
이쯤에서 시상이 이끄는 대로..
소천(小天)의 시 한 수로 머리를 좀 식히소서!
'해송자(海松子)'
지금도 참으로 독야청청(獨也靑靑)이로다!
봄날에 새로운 싹이 나와 그 여름날 뜨거움을
이겨내고, 다른 잎들은 다 낙엽 되어도,
찬 바람, 북풍한설(北風寒雪) 모질게 견디어서
오늘도 작년의 오늘처럼 그 자리에 곧곧한
그 자태로 변함없이 서 계시 누나!
이 뜨거운 삼복의 여름날!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른 그 기상과 기개는
감히 우리들 사람들이 배워야 할 용기가 아니던가!
사시사철 푸르름은 변치 않는 믿음인가?
가을날을 향한 자신의 완성인가?
맨 꼭대기가 아니면 해송자(海松子)를
내지 않는 그 고집은 무엇인고?
고고한 그 품성은 '중용(中庸)'을 공부한 듯,
청아한 일생은 변함이 없구나!
바르고 곧게 자람은 정직과 성실함의 표상이 아니던가!
산 높은 곳의 씨 내림은 생명의
은근과 끈기를 말함일세!
올 한 해도 수고로움 참고 견디어서
'해송자'를 맺어 놓으면
사람들이 따서 가실 때
'자시라'라고 권면하는 '잣'을 드리리다
잡수실 때, 한 번만이라도 '소생'. '잣나무 철학'을 생각하소서!
이 생명이 다한 날은,
날카로운 톱날 위에서 다시 탄생하여서는
어느 군자님 집의 대들보가 되어 드리든지
이름 모를 훈장님의 자그마한 책상이 되어드리든지
아니면 나무꾼의 도끼 맞고
화목으로 아궁 속에 던져질지!
나를 잡은 사람의 손에 따라
아무런 미련 없이 가오리다!
그래서 한 줌 재로 당신 서신 그 땅 위에 뿌려지리다!
마지막으로 가는 길에는 후회도 눈물도 아니 흘리오리다!
2022. 12. 5. 종현산 기슭의 청산 산방에서!
지은이 청산 산방 지기. 소천.
잣나무처럼, 바르게, 견디고, 스스로 가꾸고... 그 결과인 결실은 잣! 중용의 도를 행함도 이처럼.
사람이 무슨 일이든지 꾸준하게 일구고 지켜나간다는 것이 얼핏 보면 쉬운 일 같으나 지극히 어려움 일이지요. 이 '중용의 도'를 지켜나가 인생을 잣나무가 그 결실인 잣을 남기듯, 여러분의 인생에도 소중하고 고귀한 '인생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기원드립니다!
(2022. 12. 3. 토)
중용 제4장(知味章)의 첫 문단
子曰: “道之不行也, 我知之矣,
知者過之, 愚者不及也;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賢者過之, 不肖者不及也.
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도(道)'가 왜 행하여지지 않는 지를 나는 알고 있다.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은 도(度)를 넘어서 치달려 가려고만 하고,
어리석은 마음이 천(賤) 한 데로 쏠려 도에 미치지 못한다.
도가 왜 세상을 밝게 만들지 못하고 있는지 나는 알고 있다.
현명한 자들은 분수를 넘어가기를 잘하고 불초(不肖)한 자들은 아예 미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없다.
그러나 그 맛(味)을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다.
불민(不敏)한 소생이 보아도 이 장은 별도의 해석이 필요하지 않다. 문장도 이해하기가 쉽고 그 내용이 아름다움으로 그것으로 족한 것 같다. 대표적인 유학자 주희(朱熹)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도(道)'는 하늘의 당연한 이치로 바로 '중(中)'을 의미한다. 총명한 자, 어리석은 자, 현명한 자, 못난 자들이 도를 지나치거나 도에 미치지 못하는데, 이는 곧 타고난 각자들의 성품의 차이로 중(中)을 잃었기 때문이다. 중을 이해하고 행하여야만 '중용'이 실천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공자님의 중심사상 역시 이 '중용'의 실천에 방점(Point. Core)을 두셨다. '학문'의 배움과 익힘이 단지 '공리공론'으로만 그치지 않고 '실천 윤리'로 그 '행함'에 비중을 두셨다는 것이지요. 일종의 '실천윤리'로 지나침이 없는 '중'을 지키고 저 잣나무처럼 변함이 없는 사람, 즉 몸소 실천하는 사람을 중시하였다.
노자(老子)는 '중용'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현명한 사람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한다. 범인은 도를 들으면 기억하는 듯 잊어버린다. 어리석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웃는다" 요즘 시대에 '도'와 '덕'을 말하면 혹자들은 말하기를 "선생! 이 무슨 조선시대의 양반 놀음이냐?라고 말하며 속으로 비아냥거린다.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니 '도덕'보다는 '요령과 수단'이 앞서는 시대이다. 타인의 입장과 처지를 생각하기에는 나 자신의 문제가 더 시급하다. 공공의 이익보다는 내가 우선 살아야 하니 남이 보지 않고 듣지 않는데서는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고, 기탄(忌憚) 없이 해 치워 버리는 용감무쌍함? 그 후에는 '시치미'! 끝까지 속이려 든다.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옛말에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 참 '맛'을 알기 때문이다. '도'를 실천하려고 무진 애를 써보아야 그 재미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기쁨이라고 말씀하신 이는 그 참 재미를 알기 때문이다. 그 맛을 모르면 그 참 가치를 알 수가 없다. 먹어 보지를 않으면 그 참 맛을 알 수가 없는 것처럼 자신이 '도'를 행하여 실천해 보지를 않으면 그 깊은 속 맛을 알 수가 없는 법! 속된 말로,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이 맛은 예술이나, 인품이나, 문학이나, 과학이나, 논리, 그 모든 것에 적용되는 것으로 매우 '경제적인 Style을 형성'하는 '심미적 감성'을 말한다. 글의 맛을 아는 숙달된 문장가는 , 맛을 아는 요리사는, 맛을 아는 재단사는, 그 단어를 허비하지 않고, 음식의 재료들을 낭비하지 않고, 천을 버리지 않는 것처럼, 자기의 분야에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 줄 안다. 오늘날에 바라옵기는 우리를 '리드'하는 나라님과 나리님들이 모든 국민이 원하는 그 '맛'을 아는 자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입맛에만 맞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 법 이전에 참다운 규범과 도덕이 이끄는 참 맛을 아는 자들을 원하고 있으며, 나 자신 또한 그 맛을 알아서 실천하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맛은 '인간의 몸과 마음의 궁극적 도덕성(The ultimatate morality of human)이다. 다시 말하여 수신(Self training)의 결과로 달성될 수 있다. 넘치게 알아도 실천이 없으면, 차라리 모르고 실천함이 더욱더 중요하다는 '중용'의 '덕'이 곧 참 맛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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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속의 움직임의 단계!
Detox of forming 7 steps in Mind and Soul!
인간 본성의 마음 형태 - 죄와 허물, 망상, 반 중용으로 뒤틀어진 마음 형태 - 그 잘못된 심리 형태에 새로운 학문과 깨우침의 새로운 정보 주입 - 새로운 존재, 형태, 현상의 발현으로 중용으로 가는 마음 - 내 안에 새롭게 형성된(Be detoxed) 인격, 인품, 인성들의 전달, 교통, 교육. - 한 개인의 마음의 정화(Furification. Detox)는 가족, 직장, 사회, 국가를 변화세켜 하나의 좋은 관습으로 형성(도의 합일) - 합일된 사람들의 삶 가운데의 실천(Performance)!으로 나타나는 정화된 개인, 가족, 사회, 국가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이다!
한 사람의 마음 청결과 진실한 깨우침이 그 가족, 직장. 사회, 국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선, 오늘 이 자리에서 '나'부터...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를 덮으니...
어찌하여 '나'는 변하지 아니하고 다른 이들만 변하라고 소리치니 그것은 정녕 '중용의 도'가 아닐지라! 변화와 변혁과 내적인 혁명은 '나 자신'부터 실행하는 '中庸之道'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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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2. 6. 화. 청산 산방에서 소천 쓰다)
중용 제5장(道其不⾏章)의 첫 문단!
자왈 : "도기 불행의 부(道其不行矣夫)"
공자님의 시대에도 역시나 "중용의 도'가 행하여지지 않았음을 탄식(Lamentation)하고 계심이다. 이 탄식 또한 하나의 철학이다. 앞장에서 언급하신 내용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한 말씀이다. 공자님이 보신 그 시대의 상(時代相)은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를 않았다. '세상이 어지럽고 사람의 성품도 포악하고 교육도 제대로 되지 않아 중용이 정녕 행하여지지 못하는 시대'를 참 교육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한심하고 통탄스러우셨으리라! 오늘을 바라보는 대개의 양식이 있는 학자나 선비님들도 아마 공자님이 보시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공자님은 논어의 "공야장 6편"에서, "도불행 승부 부우 해(道不行 乘桴 浮于海) - "도가 행하여지질 않으니, 나는 뗏목을 타고 바다로 가려니...라고 탄식을 하신 적이 있다. 이 말씀은 자신이 아직까지도 어진 임금을 보지 못함을 개탄하신 것이다. 이러한 의식상태를 가리켜 우환 의식(憂患意識)이라 부른다. 이 우환이란 말은 걱정은 걱정이로되 공포는 아니다. 이 우환은 소인배들의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대인의 걱정거리인데, 그것은 성인(聖人)이 되지 못함과, 배우지 못하여 덕이 부족함과, 천지의 세계가 바르게 자리잡지 못함을, 이 땅의 만물에 대한 염려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서양과 동양의 인간을 바라보는 근원적인 시각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정확한 규정은 아직까지는 없는 것으로 안다. 인간을 원죄(原罪)에 시달리는 존재로 볼 수도 있고, 고업(苦業)에 지친 군상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고, 정욕 덩어리의 생물학적인 주체로 규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인간을 본질적으로 다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인간을 바라보든지 간에, 서구적인 인간관은 인간을 애초부터 불완전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 본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존재를 통하였지만 구원의 길에 이른다는 것이다. 또한 해탈이라고 하는 대명제를 인간에게 부여하고 평생을 통하여 그것을 구도(求道)하도록 교육하여 온 것도 사실이다. 생물학적인 규정도 이 역시 '과학'이라는 또 다른 '종교'장사를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어찌 되었던 이 세상의 다수의 인간들이 따라가고 있는 '종교'라는 틀(Frame) 안에서는 인간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구원', '해탈'이라는 명분 하에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의 본질을 흐려온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데, 공자님은 이 장에서 '세상의 있어짐의 모든 것'들이 '중용의 도'안에서 실현되지 못함에 있어서 시대의 '정신적 지주'로서 바라볼 때, 우환 의식을 가지시고 개탄하셨던 것이리라! 그러하다면, 우리는 이 '중용의 도'를 바르게 실천해 나가면 될 것이다. 그러나 '너나 나나' 모두가 바르고 선하고 고결하고 덕이 되는 것을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니 오늘도 이 글을 통하여서 그 '중용의 도'안에서 줄탁동시(茁琢同時)하여 한 걸음 더 그 실천하는 자의 반열에 들어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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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7. 17. 토. 청산 산방에서 소천이 쓰다)
중용 6장의 첫 문단!
순기 대지장(舜其大知章)
子曰(자왈) 舜(순)은 其大知(智)也與(기대지(지) 야여)신저
舜(순)이 好問而好察邇言(호 문이 호찰 이언)하시되
隱惡而揚善(은악이 양선)하시며
執其兩端(집기 량단) 하사
用其中於民(용 기중 어민)하시니
其斯以爲舜乎(기사 이 위순호)인저!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순(舜) 임금은 크게 지혜로우신 분이실진저! 순임금님은 무엇이든지 물으시기를 즐겨하셨고 비근한 말들을 살피기를 좋아하시었다. 사람의 추한 면은 덮어 주시고 좋은 면은 잘 드러내어 주셨다. 어느 상황이든지 그 양 극단을 고려하시어서 그중(中)을 백성에게 적용하시었다. 이것이 바로 그분께서 '순'임금님이 되신 까닭이다.
중국의 '순'임금은 기원전 2155-2207년에 '중국'을 다스린 뛰어난 오제(五帝)의 한 분으로서 성군이셨다. '요'임금과 더불어 태평성대를 구가한 성제이다. 그는 어려움에 안분(安分)하며 부귀에 넘치지 아니한 삶을 살았다. "예로부터 성현들은 모두 이 인간의 부귀를 심상(尋常) 시하여 부귀가 온다고 그다지 기뻐하지도 않고, 부귀가 간다고 그다지 근심하지도 않았으니, 옛날 순임금은 밭 갈고 질그릇 굽는 천역(賤役)을 하던 사람으로 천자의 위를 받았으나 거기에 조금의 넘
(중국의 순임금)
침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한 나라의 정치적 리더가 개별적 군자의 덕성을 완성하려고 애쓰는 자이면 그 나라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한 사회나 국가의 지도자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이상이 실현되는 사회, 국가를 만들어야 하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정치적 지도자는 이 '순'임금의 겸손과 청렴을 삶 속에서 성실히 실천한 자 들이었다. 중국의 문화의 영우로 우리는 흔히 말하기를,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을 가리켜서 인문주의의 가치를 바로 구현한 사람들이라 한다. 그 옛날에 이들은 소박한 성품을 가지고 일상의 오륜을 잘 지키어서 남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산 사람들이었다.
지금의 시대에 절실히 요구되는 한 국가의 지도자상이 바로 이런 '순'임금의 도를 따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참으로 이런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시대이다. 국가행정의 리더들을 검증하면 모두 다 걸림돌에 걸려서 낙마하는 것이 보통인 것처럼 보인다. 참으로 통탄해야 할 일이다. 또한 이 시대에서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바로 '질문'하는 것인데, 이 묻기를 요즘의 사람들은 잘하지 못한다.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안 하는 것인지? 소생의 생각에는 '안 하는 것'이라 본다. 왜냐하면,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하고 자기주장만 한 것은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모든 쟁점에 있어서 타협이 이 루어지지를 않는다. 평행선만 달리다가 결국에는 패거리 싸움질로 결말을 본다.
그래서 지역주의니 '친 O파'니 뭐니 하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O 사모' 모임이라고들 한다. 누구누구를 사랑하는 모임이라나 뭐라나! 패당을 지어 길거리에 모여서 소리 지르고 편 가르기 시위를 밤새도록 하는 나라는 세계의 어디에도 없다. 참으로 극성맞은 민족의 한 단면이다. 오늘은 한편이었다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죽일 놈이라고 떠들어 댄다. 그리고 자신은 완전무결한 것처럼 시치미들 뚝 따고 앉아서 점잖은 표정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시대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들...'국민이... 원하기에" 어디 어떤 국민이 원하는가? 다 자기가 원하고 자기 당 패거리들이 원하면 다 '국민'을 가져다 붙인다. 국미의 발음은 '궁민(窮民)이다. 즉, "어렵고 가난하고 궁색한 사람들"이다는 말이다. 그래요 이 '궁민'들 마음 놓고 잘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셔요! 제발 부탁이랍니다. 금배지 어르신들과 푸른 기와집 아래의 목민관들이여! 이런 분 들! 이 글 좀 읽어 주셨으면 한다. 그리고 '중용의 도'를 공부 좀 하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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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2.4. 일. 청산 산방에서 소천 쓰다)
중용 제7장
(皆曰予知章)의 첫 문단!
子曰: “人皆曰予知, 驅而納諸罟擭陷阱之中, 而莫之知辟也. 人皆曰予知, 擇乎中庸, 而不能期月守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순임금처럼 지혜롭다고 말하는데, 나를 휘몰아 그물이나 덫이나 함정 속으로 빠트려도 나는 그것을 피하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내가 지혜롭다고 말하는데 나는 중용을 택하여 지키려고 노력해도 불과 만 한 달을 지켜내지 못하는구나" 여기에서 우리는 공자님의 멋진 인간성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솔직(率直)과 담백(淡白)하심이다.
오늘이 Key word는 지혜(知慧)이다. 주자(朱子)는 참다운 지혜에 대하여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조금 배우면 잘난 체하지만 결국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 자신을 망치는 것이 일쑤다. 특히 춘추 전국 시대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자기의 지략과 재주를 믿고 제후들을 찾아다니면서 벼슬 길에 올랐으나 대부분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그것은 참다운 지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을 도모함에 있어서 중(中)에다 그 바탕을 두어야 함에도, 그 반대로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언제나 불안과 실패의 요인을 항상 안고 있었다. 큰 지혜란, 한쪽으로 크게 치우치거나 지나치지 않는 타당의 극치인 중(中)을 택하여 그것을 실행함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중용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르기를,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도리로 가장 안전한 것'은 '참다운 지혜'라는 것이다.
'지혜'란 무엇인가? 불교의 '법구경'은 이렇게 적고 있다. "두려움도 없고 미움도 없으며 착함을 지키는 것이 지혜이다"라고... 성경에는 지혜를 찬양함에 있어, "지혜를 찾으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지혜를 얻는 것이 은보다 값있고 황금보다도 유익하다"라고 말한다. 재미있는 고사를 하나 예를 들어 보자. 제(齊) 나라의 환공이 고죽국을 토벌하였을 때, 출발을 봄에 하였고 돌아올 때는 겨울이었다. 겨울날에 변덕스러운 날씨에 길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지혜가 있는 명제상과 대부인 두 사람, '관중과 습붕'이 함께 있었다. 관중(管仲)이 하는 말이 "노마지도(老馬知道)라고 하면서, 이럴 때에는 늙은 말에게 배워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늙은 말을 풀어 주고 그 뒤를 따라갔더니 마침내 길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곧 산길로 접어들면서 먹을 물이 부족하여 낭패를 만났다. 이때에 습붕(槢朋)이 말하기를, " 개미란 원래 겨울에는 산의 남쪽에, 여름에는 산의 북쪽에 서식하는 습성이 있으니 개미집을 여덟 자 정도를 파면 반드시 물이 나온다"라고 하면서 산기슭을 돌아 개미집을 찾아서 남쪽을 파니 과연 물이 있었다는 고사이다.
한비자(韓非子)가 이 이야기를 듣고서 하는 밀, "관중이나 습붕같이 지혜 있는 자는 모르거나 어려운 일을 만나면 미물(微物)인 말과 개미를 스승으로 삼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을 보시라!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조그만 토막상식에 의존하며 좀처럼 지혜를 구하려 하지를 않는다. 자신의 어리석음은 조금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노마지지(老馬之智)라 하였다. 나이 든 어른이 그 경험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고, 그에 따른 동서고금의 성현의 지혜를 공부해야 할 것이다. 도대체 물어보는 사람이 없다. 다 제자신이 최고요, 자기의 주장만이 정통성과 타당성과 당위성이 있다고 목청을 높인다. 어디서? 여의도 국회 '의사(醫師)? 가 없는 의사당(議事堂)에서... 저들은 입을 열면 모두 다 '국민이 원한다'라고 매일매일 속이고 거짓으로 '구라'를 치면서...
위의 본 단락에서 깨닫는 바는 공자님의 솔직 담백한 정신이다. 그는 성인으로서 만인의 추앙을 받고 있는 처지이지만, 이런 정직함을 고백할 수 있었던 용기와 또한 그의 제자들까지도 후세에 그 기록을 조금도 빼지 않고 남길 수 있는 용기! 그러한 솔직함과 부끄럽지 않을 용기(勇氣)가 바로 유교문화의 핵심이요, 인문문화의 상식의 바탕이다. 여기서 자사 또한 그러한 공자님의 정직성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그리고 공자님은 제자인 안회(顔回)가 인(仁)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시고 자신은 그를 다를 수 없노라고 고백하신 것이다. 스승이 제자보다도 못하다고 자신을 낮출 수가 있는가? 이는 공자님이 아니시면 아마도 불가능하리라. 자신을 낮추어 범용 한 인간을 격려하고 계신다. 제자들의 발을 씻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영혼의 낮아짐도 이에 버금가는 일이 리라!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비록 '중용'을 한 달 이상 실천하는 데는 실패하였으나 '성인'의 삶에서는 벗어난 일이 없었다. 누가? 공자님께서는!
노인의 지혜(智慧)를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시라...
늙은 말이 기을 찾듯이! 인생의 길을 바로 걸어도 보았고 비틀거리면서 걸어도 보았고 똥통에 빠 자기도 하였고, 맑은 폭포 속에 들어가시기도 하였으니...
그러나 중용의 도를 아시는 늙은이면 더 좋겠지요!
늙을 노(老) 자는 흙 '토(土)' + 숟가락 '비(匕)'의' 합의어'이다. 무슨 뜨이냐 하면, 늙음은 이 땅에서 오랫동안 생명의 유지를 해 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밥숟가락을 오랜 기간에 살아 남고, 또 몸을 움직여서 사는 방법을 터득한 자라는 말씀! 그러니 '사는 법'과 '살아남는 법'을 잘
알고 계시니... 저분들께 여쭈어 주시기를... 노인의 지혜 '智慧 '를 듣고 배워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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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1. 30. 목. 청산 산방에서 '소천'이 쓰다)
중용 8장 강해
'본문' 첫 문단!
子曰: “回之爲人也, 擇乎中庸, 得一善, 則拳拳服膺而弗失之矣.”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 안회의 사람됨이 대단히 훌륭하다. 그는 중용을 실천함에 있어, 한 가지 선한 일이라도 발견하면 그것을 가슴에 새겨 두었다가 두고두고 반드시 실천한다"
안회(顔回)는 공자님의 수제자로 서른 남짓의 나이에 요절(夭折)하였다. 그(顔淵)의 장례에서 공자님은 그의 관(棺)을 잡고, "아아!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 아아!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 (아.天喪子, 아. 天喪子) "하시며 통곡(痛哭)하셨다고 한다.
다음은 논어에 나타난 공자님의 안회에 대한 소회(素懷)이다.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 "훌륭하도다! 한 그릇의 밥, 한 쪽박의 물로 더러운 마을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견디질 못하는네, 안회는 그것을 잘 견디는구나. 회여, 참으로 훌륭하도다", "회는 석 달 동안이나 인(仁)에 어긋나지를 않는구나! 나날이 정진할 뿐이구나", "안회는 거의 도(道)에 가까웠고, 그러나 그의 쌀독은 자주 비는구나"
이처럼 안회는 공자님으로부터 찬사를 받은 덕행의 인재로서 후에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복성(復聖)이라고 추존(推尊)하였다.
공자님께서는 그의 제자인 안회를 너무나 애틋한 심정으로 바라보신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의 도와 학문을 이어받을 만한 인물로 안회를 염두(念頭)에 두셨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더욱이 안회는 공자님이 나고 자란 산동성의 곡부(曲埠) 사람이었고, 그러니까 후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나이는 무려 30세가 적었으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제자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이 잘 나타나고 있다. 안회는 어려서부터 공자님의 문하에서 자랐고, 그는 매우 영민(英敏)하며 덕성(德性)이 있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하여 어려서부터 천재(天才)였다. 그의 인품을 공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였는데, "自吾有回, 文人日益親. 내가 안회를 얻은 후, 나의 문하(門下)에 있는 제자들이 날로 친해졌다" 안회가 그렇게 문하생들 간의 친목을 도탑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공자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인(仁)을 실천함으로써 공자님의 이상을 구현(具顯)한 인물이었다. '지행합일'의 '덕목'을 몸소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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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9장 강해
2022. 12. 13. 화. 청산 산방에서
소천이 쓰다!
본문은
子曰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 !
子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천하의 국가를 고르게 다스릴 수 있고, 작록도 사양할 수 있으며, 시퍼런 칼날을 밟고 갈수 있다 해도,
中庸不可能也
중용을 지키는 것은 잘 해낼 수 없다."
주자의 '중용혹문(中庸或問)에서 말하기를, '중용은 비록 이해하기 어렵고 행하기 어려운 일은 없으나 쉬운 것 같으면서 실은 어려운 것이 바로 중용(中庸)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도 '중용은 비록 능하기 쉬울 것 같으나 사심이 없는 자가 아니면 미치지 못한다'고.
이 말을 지금의 우리에게 조명해 본다.
쉬운 일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부지기수이다. 말은 너무나 쉬운데 그 실천이 너무나 어려운 것이다. 인간생활의 기본적인 도덕적 기초지식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모두 다 배웠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는 정작 이를 지키려 하질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고집이, 쓸데없는 자존감이, 허례허식을 탐하는, 내세우기 좋아하는 나의 그 뭣같은 성질이 '나'를 점점 망쳐가고 있질 아니한가?
작음에 있어 '중(中)'이 없이는, 보다 큰 일에는 절대로 '용(庸)'을 적용할 수 없음이여!
공자의 말씀을 빌려 순(舜) 임금이 왜 순임금으로 불리며 추앙받는지를 소개한다. 요(堯) 임금은 혈연이 아니었음에도 큰 덕을 갖추고 지극한 효성으로 그 이름이 높았던 순에게 왕위를 선양했다. 후대에 요순시대와 태평성대가 동일시된 것은 이렇게 덕으로써 왕위를 승계한 선양 때문이 아닐까 싶다.
중용 6장의 키워드는 큰 지혜(大知. 고대에는 智와知가 같은 개념으로 쓰였다고 함), 묻기를 좋아함(호문.好問), 일상에서 나오는 가까운 말들을 살핌(호찰이언. 好察邇言), 양 끝단을 잡다(집기 양단. 執其兩端) 등이다. 공자는 순임금이 어떻게 하여 큰 지혜를 갖춘 성군이 되었는지를 상기한 키워드를 활용하여 설명한다.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고 가까운 말들을 살피기를 좋아하였고(舜好問而好察邇言)!
그 양 극단을 모두 잡아 그중을 찾아 백성에게 썼다(執其兩端 用其中於民)".
여기서 왕의 물음은 겸덕(謙德)의 발로로 볼 수 있다. 신하와 백성들에게 묻는다는 것은 배움을 얻겠다는 취지보다 그들의 뜻을 찾겠다는 것이고 그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겠다는 것이다. 무위이치(無爲以治)의 리더십은 이렇게 물음을 통한 소통에서 시작된다. 호찰이언(好察邇言)은 가까운 말들을 살피기를 좋아한다로 해석되는데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말들도 촘촘한 그물로 받쳐 살피는데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다. 왜일까? 중용에서 이야기하려는 中은 진리의 본체를 말하는 것이다. 진리에 다다르는, 진리와 만나는 것은 내가 두발 딛고 두 눈 뜨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만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문장으로 보인다. 일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과의 대화, 그 범위를 확장하여 우리가 사람과 사물을 통해 접하게 되는 모든 느낌들까지도 진리에 다다르는 징검다리 일 수 있다는 것을 성인의 반열에 있는 순임금의 생활 루틴인 호찰이언에 담아 말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양극단을 잡아채서 중을 찾아내어 그것을 백성에게 썼다는 말씀은 두 측면으로 해석이 된다. 말씀 그대로 여론이 분분할 때는 서로 대립하는 양단의 주장을 섭렵하고 포섭하여 그때에 맞춘 중 자리(時中)를 얻어 백성들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것은 마음의 사심(私心)들은 이미 경도되어 끝단에 있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 사심들을 조복(調伏)시키는 작업을 집기 양단으로 표한 것이라 본다. 이렇게 양단에 몰려있는 사심을 잡게 되면 당연히 公心만 드러나 이것으로 수신(修身)과 치세(治世)의 길을 잡으니 중용의 도가 내 안과 밖의 구별 없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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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10장 강해
2022. 12. 13. 수.
청산산방에서 소천이 쓰다!
본문은.
子路問强
子曰 南方之强與 北方之强與 抑而强與
寬柔以敎 不報無道 南方之强也 君子居之
衽金革 死而不厭 北方之强也 而强者居之
故君子和而不流 强哉矯 中立而不倚 强哉矯
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
강해는.
子路問强 子曰
자로가 강함에 대해 묻자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南方之强與 北方之强與 抑而强與
"남방의 강함을 말하느냐? 북방의 강함을 말하느냐? 혹 그대가 지향하는 강함을 말하느냐?
寬柔以敎 不報無道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으로 가르치고 무도함에 보복하지 않음이
南方之强也 君子居之
남방의 강함이니 군자는 그곳에 거한다.
衽金革 死而不厭
무기와 갑옷을 깔고 죽어도 싫어하지 않음이
北方之强也 而强者居之
북방의 강함이니 강한 사람은 그곳에 거한다.
故君子和而不流 强哉矯
그러므로 군자는 화합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아 강하고 굳세구나!
中立而不倚 强哉矯
중앙에 서서 치우치지 않는다, 아 강하고 굳세구나!
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나라에 도가 행해지고 있어도 궁색한 시절에 품었던 지조를 바뀌지 않는다. 아 강하고 굳세구나!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아도 품었던 지조를 죽음에 이르러도 바꾸지 않는다. 아 강하고 굳세구나!
중용은 그 실행이 최선의 도(道)이니라...
'지행합일'
(2022. 12. 13. 화. 중용을 다시금 써 본다. 청산 산방에서)
중용 제10장 강해
오늘 새벽은 이까지만.
이 글은 꾸준히 쓸 것이오니...
2022. 12. 10. 토. 아침 9시경에...
청산 산방 지기 소천이 쓰다.
(청산 거사 소천 권용만 교수 철학. 심리학 P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