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가 온종일 눈으로 덮인 날. 오늘은 2022년의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날'이다. 화두(話頭 )는 당연히 '섣달 그믐날'이다. 이 날에 전해오는 우리네 생활 속의 '시세 풍습(時勢風習)'을 좀 이야기해 본다.

섣달 그믐날은 우리 어머니 잡는 날이다. 소생이 어릴 적이니까 지금부터 약 60여 년 전의 일이다. 그 시절의 대한이면 방문을 나서는 순간 다 얼어서 손발이 얼얼하다가 곧 얼어 버렸다. 부엌으로 가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순간에 그래도 동상(凍傷)은 피할 수가 있어서. 꼭두새벽에 일어나시는 어머니는 늘 이런 일을 겪어야 하셨다.
오늘이 바로 섣달 그뭄날이기에, 시골의 아낙네들은 말 그대로 눈코 뜰 새가 없는 날이다. 다가오는 새 해의 첫날을 맞기 위하여 어머니는 너무나 분주하셨다. 한 일주일 전부터 제사상에 쓰이는 놋그릇을 제일 먼저 닦으셨다. 그런데 이 일이 사람 잡는 일이다. 소쿠리로 몇 개나 되는 지난 추석에 사용한 놋그릇 제기들은 새파랗게 녹이 슬어서 가관이다. 어머니는 이 그릇들을 머리에 이고서 방죽에서 흘러나오는 개울에 가신다. 그리고는 볏짚으로 둘둘말은 지푸라기에 모래와 기왓장 깨어진 가루를 묻히고 녹이 사라지고 광택이 나기까지 문지른다.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볼을 때리고 차디찬 개울물은 손을 얼게 한다. 고무장갑이라고요. 그 시절에 무슨?
( 소생의 어머님 생전의 모습. 여중군자)

그리고 또 설명절을 앞두고는 어머니는 온 가족의 옷을 다 빨으신다. 일곱 식구 속내의부터 겉옷가지까지. 나무로 만든 함지박으로 서너 개가 족히 넘는다. 이 역시 물을 조금 데워서 개울가 빨래터에서 온종일 방망이 질을 하여 때를 빼고 양잿물에 헹구어서 마당에 빨랫줄어 널어서 4-5일은 족히 말려야 하니, 그 일이 사람 잡는 일이다. 아버님 옷은 모두 다 솜을 얇게 놓은 흰색의 바지저고리를 일일이 발로 밟고 다듬이 질 하시고 다림질에 흰색 고무신까지 깨끗이 해야 하시었다. 머리에 일찍 내려앉은 서릿발 같은 머리털에 때 묻은 수건 한 장으로 가리고 새벽부터 일어나 삼시세끼 식구들 먹이시고 낮에는 빨래터로 밤에는 호롱불 아래서 떨어진 옷과 양말 쪼가리 기우시고 잠을 주무시는지 날밤을 지새우는지는? 새벽닭이 울기가 무섭게 부엌으로 가시어 솔가지에 불 붙이고 정화수 장독대에 얹으시고 두 손으로 집안의 무고무탈을 기원하시던 그 어머님! 그래도 한 십 년을 소생이 모시다가 99세 열 달로 소천하
시었다. 소생도 이제 고희를 바라보니 그 옛날 옛날의 어머님이 이 새벽은 몹시도 그립구나...
이 어머니는 섣달 스뭄날에는 불을 때서 나오는 그을음으로 정지간은 온통 숯덩이로 가득하다. 몽당 빗자루를 장대 끝에 매달아서 부엌의 구석구석의 거미줄과 그을음 막대기를 털어내어 정지간 청소를 마치시고는 무쇠솥뚜껑을 삼각형 돌을 놓아서 만든 불터에 올려놓으시고는 하루 종일 앉아서 전을 부치시고, 한편 제수나물을 지지고 볶고, 튀기고 하시면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머릿수건으로 잠시 닦아 내린다. 이런 모습은 사람이 아니라 무슨 기계 같으셨다. 속으로 이러다 우리 엄마 잡겠네... 그러나 어린 소생은 그저 튀김 주워 먹는 재미로 하하 호호!
이 섣달 그믐날에 아버지는 마당을 댓비로 깨끗이 쓸고, 우물가 청소부터 집 안팎을 대청소하시고는 오후가 되면 의관을 갖추시고 동네의 가장 연장자 어른을 찾아서, 그분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묵은세배'를 하러 가신다. 우리들은 장날에 엄마가 사주신 새 설빔을 몇 번이나 입었다 벗었다가 야단법석이다. 내일에 우리 집에 오시는 고모부들께 절하고 세뱃돈 받을 그 계산에 입으로는 히죽거린다. 매년의 끝날인 이 날은 잠을 자면 눈썹이 흰다고 하여 밤새껏 안 자려고 하나, 밤이 깊으면 잠에 떨어진다.
동쪽으로난 창문에 밝은 빛이 비치면 모두가 기상! 그리고 동쪽의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합장하여 인사를 드린다. 이제 정말로 새 해가 왔으니, 무슨 특별한 소원을 빌기도 하고....
설날이 왔어요!
설날의 풍경은 내일로 이어집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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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종현산 자락의 '청산산방' 지기.
지행선인(智行鮮人). 소천. 권용만 교수(철학. 심리학 Ph. D. / 신학 Th. 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