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불이 타는 듯 더운 날이다. 三伏의 더위이니까! 그러하려니 하고 諦念(resignation)함이 가장 좋은 代案이리라... 오늘의 쓰는 글의 주제(subject)는 '득도(得道)'이다. 참 陳腐한 單語이다. 이것을 알려면 우선 '도'가 무엇 인가를 알아야 한다. 道가 무엇인가?
'도'라는 것은 길이다. 길 도자이다. 길은 무엇인가? 인간이 다닐 수 있도록 정비된 장소를 말한다. 비단 인간뿐만 아니라 땅 위를 걸어 다니는 땅짐승도, 하늘을 나는 날짐승도 모두가 자신이 다니는 길이 있음이여!
이 길을 일러서 '길'이라고 하고,
한자어의훈(訓)은 '도(道)'이다. 이 길 '도' 자(字)를 살펴보면, 목숨을 나타내는 머리수(首) 자를 '쉬엄쉬엄 갈 착(辶) 자'가 받치고 있다.
그러므로 도라는 말은 모름지기 '한 생명을 지켜 나가는 바른 길'이라는 뜻이리니... 시고(是故 : therefore), 이 길 '도(道)'자에는 큰 뜻이 內包되어 있음이다.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생명이 나가야 하는 길! 바른 길! 옳은 길! 즉, '도(道)'란 어디든지 있으나, 그 도에는 가야 할 길이 있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는 법! 잘 닦여진 길이 있고 전혀 다니지 아니한 길이 있다. 필자는 지금 한 생명이 가는 길! 즉. 인생의 길을 말한다. 잘 닦여진 길이 아니면, 사실 이 것은 사실 길이 아니다. 미개척으로서 험하고 복잡하고 가기가 힘든 곳을 말한다. 아니 갈 수 없는 곳을 말한다. 그래서 옛말에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應對하지를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들 인간은 굳이 가지 말아야 하는 길을 고집을 세워서 기어코 간다. 그래서 그 끝에서 낭패를 보고 나서야 그것이 가야 할 길이 아닌 것을 깨닫는다. 지혜가 있고 현명한 사람은 한 번만 보고도 가야 할 길인지? 아닌지를 안다. 겉으로 눈에 보인다고 해서 다 온전하고 안전한 길은 아니다. 길에는 언제나 예상치 못하는 伏兵이 도사리고 있음이다. 그래서 올무를 놓고 먹잇감을 기다린다. 그래서 유혹의 길로 들지 말라는 것이다. 길은 그저 보통의 명사이다. 하나, 그 누가 그 길을 즉, 도를 바로 보고 바로 가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아니던가?
인간을 유혹하는 길은 달콤하고 갈 만하여서 모두가 그 길에 빠진다. 마약의 길! 죽음의 길! 패배의 길을 누구라서 가고 싶을까마는... 인간은 언제나 욕심(慾心)이 앞을 서서 자신의 장래의 길을 망치는 법이다. 그래서 도라는 것은 참으로 단순하다. 그런데 이 도가 무엇이 있느냐 하여 과대 포장으로 인간을 속인다. 한 때, 지하철 역에서 젊은이들이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서 하는 말, "도를 아십니까?' 그러는 저는 도를 알 까나? 도가의 수장도 이르시기를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라 하셨다.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그것은 '도'가 아니다. 만물의 이름을 지은 것이 다 그것의 본질이 아니듯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면, 도(사람이 가는 길)에는 그 실체가 없다. 달마대사가 일시기를, '무자진경(無字眞經)이라 하였다. 우리는 무엇이 보이는 것을 참 좋아하고 그 유혹에 금방 빠지는 아주 어리석은 경향이 있음을 부인치 못하리라! 그래서 도를 닦는다고 해서 심심산골에 들어가서 매일 바위 위에 올라가 가부좌를 하고 명상? 인지 기도? 인지 무엇인지를 아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보고 도인(道人) 또는 도사(道師)님이라고 부른다. 과연 그들이 참 도인이며 도사인가? 겉으로 보여주는 도인은 없고 도사도 없다. 마치 글 안에 진리가 없다고 말하는 불교의 거승 달마대사처럼... 무자진경!
우리가 가는 평범한 그 길! 그것이 바른 길이면 참다운 '도'를 가고 닦는 것이다. '도를 닦는다'라고 한다. 참으로 지당하신 말이다. 우리가 다니는 길은 매일 쓸고 갈고닦지 아니하면, 그 길로 종국에는 누구도 다니지를 못한다. 왜냐하면 더럽고 무너지고 파이고 심지어는 장마통에 떨어져서 끊어지고... 더 이상의 길의 구실을 못하니...
지금 필자는 장황한 설명을 하고 있다. 도(길. way. road)라는 것은 참 단순한 것이다.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길(도)이 이러할진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마음의 길은 어떠할까요?
이제 본론으로, 당신의 마음 안의 길, 즉 마음의 도(道), 다시 말하여서 심도(心道)는 어떠하신가? 그저 내 속은 남이 알 수 없는 것이니 내 마음대로 가고 오고, 쌓고 무너뜨리고... 우리는 우리 마음 안의 길을 잘 알고 보고 아주 조심스레 걸어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는 범부(凡夫), 匹夫匹婦의 진솔한 삶의 도(道)인 것이다.
'참의 길', '진실한 인생의 길', '보람된 인생의 길'은 그대의 곁에 있으니, 먼 데로 가서, 또는 타인에 의지하여 그 길을... 그 도를 찾지 마옵시고, 이제부터라고 그대께서는 勇猛精進하시어서 그 길을 바로 찾으시기를... 성서는 말한다! 찾으라 구할 것이라고, 두드리라 열린다고 하니 실천하시어 그대 자신이 참 도인과 도사님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이제부터는 도를 얻는다는 의미의 득도(得道)에 대하여 몇 마디 하려고 한다. 득도(得道) 또는 도통(道通)라! 참으로 거창한 말이다. 얼핏 들으면 뭐 대단한 것 같다. 손바닥의 힘인 장풍(掌風)으로 물건을 날리고, 독심술?로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고, 쌀알들을 소반 위에 뿌리고는 지난 일을 알아맞히고, 맨발로 서슬이 시퍼런 작두를 타고, 오방신장을 불러서 그 무거운 대나무 막대기를 마치 손부채 다루듯이 공기놀이를 하고... 참으로 도가 터서 신과 합일(合一)하여 세상사를 내다보는 듯이... 우리는 이런 것을 보면 아! 그 사람 도가 네! 도통하였네! 득도의 경지에 도달했네라고 한다... 정말 그러할까?
그러면 진정한 득도란 무엇을 말하는가?
지금 그대께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요? 그 일에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지요? 그래서 일 평생을 그것으로 돈 벌고 그에 의지하여 살아온 것이지요? 그러면 그대는 그 일에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시지요? 그럼 다 되었네요. 바로 그 일에 도를 텄다는 것이지요. 곧 득도하였다는 말입니다. 도라는 것은 반드시 자기 자신의 일과 마음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다른 이들의 일과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누구나 명심하실지라. 무슨 일이든지, 누구든지 간에 한 일에 모든 것을 통달하였으면 그 일을 통한 인생을 보시라! 그러면 밝고 맑은 자신의 인생이 밝히 보이시리라. 그리고 남의 것을 탐하지 마실지라. 그는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평생의 땀과 시간 그리고 피나는 노력으로 이룬 것이니... 당신의 경우도 다 마찬가지... 심심 산속의 깊은 계곡의 어는 바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하는 것만이 도가 아니니... 하루 종일 목탁과 불법의 경전을 외운다 하여 그것이 도를 얻는 길이 아니니... 참 도란 자신의 살아가는 인생의 길에서 매일처럼 깨달아 알고 개선하여 고쳐나가며 참 선(善)을 이루어 나가는 삶을 의미한다. 어디에도 나를 벗어난 참 도는 없다. 자신이 행하는 무슨 종교행위와 그 행사 안에 무엇이 크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적어도 행하는 시간(예배라는 시간 속에서는)에는... 그러나 그 마음과 느낌이 평생을 변하지 않는 길(道)에 서서 가야 한다. 그것이 바른 도이며 우리의 성품이 나가야 하는 길 즉, 도이다. 이것을 시행하여 나아가는 사람을 일러 도인(道人) 도사(道士)라 함이 맞는 이야기이다. 성직이라는 직업과 직분이 나를 만들지 못한다. 결국에 나는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이 말을 특히나 명심하셔야 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만나지 못하고는..."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의 세 단어는 하나이다!
오늘도 참 도를, 길을 찾아 가시기를 축원하여 드립니다!
2023. 7. 26. 청산 산방에서. 작은 선비. 소천 이 글을 쓰다.
우리가 매일 건너가는 세월의 징검다리! 길. 그리고 참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