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역사에 기록될 만한 하나의 정점을 찍어가는 코스모스(Cosmos)의 시간을 만들기 위하여...
이제 내 나이가 옛날이면 칠순의 고희를 바라보는 시간 속에 서 있기에 문득 나의 삶이 더욱더 소중하게 느껴지곤 한다. 이전에 우리는 환갑라고 하는 말은 옛날에는 60 갑자가 다시 돌아오고 그다음 해가 오면, 온 가족들, 친지, 친구들이 모여 성대한 잔치를 하곤 하였고, 고희(古稀)란 옛 시절에는 70세를 사는 사람이 드물어서 그렇게 하였으리라... .
하나, 지금은 이제 이 나이가 되면 인생의 웬만한 일들은 다 겪어서 삶에 대한 관조(觀照)의 시간이 되는 듯싶다. 인생이 20 세에 입지(立志)하여 그 뜻을 세우고, 40 년을 면학하여, 한 10년 정도 가르치는 일에 서면, 그 아니 족하지 않으랴!
지금부터는 나의 인생을 관조하기 위하여는 먼저 내관(內觀)의 시간을 많이 가져 보려고 한다. 나의 내면의 세계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진아(眞我)의 발견을 위하여 오늘도 자연 앞에 겸손히 머리를 숙이며, 세상 사는 삶의 참다운 이치를 깨우치기 위하여 나의 비움의 시간을 가지려 조용히 무릎을 꿇고 '살아 오름'의 법칙을 배우려 한다.
'산다'와 '살아 있다'는 그 깊은 의미에서 확연히 다르다.
나는 직금 '살아 있다' 고로 '살아간다'
내 마음 안의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힘을 쓰니. 그것은 산 자의 아우성! 죽은 자는 그저 말이 없을 뿐!
오늘은 그동안 밭에 심은 고구마를 캐는 날이다. 5월 중순 심어 놓은 고구마 한 싹이 이렇게 많은 고구마를 캐게 하여 주셨다. 자연의 섭리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햇볕에 나온 처음 싹은 마르고, 그 싹의 양분을 먹고, 새로운 줄기가 나서고, 땅 속의 뿌리가 내려서 그 결실을 맺은 것이기에 너무나 숙연한 마음이다. 한 줄기가 죽어서 그 뿌리를 내리고, 그 뿌리가 자라면서 새싹이 더위도 이겨내고 지루한 장마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아! 나의 인생도 이렇게 살아가기를 겸손히 마음먹어 본다.
소생은 이 고구마와 같은 결실을 보려고 봄부터 오늘까지 부지런히 싹을 심고 물을 주고... 그러나 이를 맺게 하는 이는 뜨거운 태양빛과 바람과 이슬들의 교향곡 속에서! 하나의 씨(싹)가 땅 속에서 움트고 나와서 햇볕과 친구 하며...
나의 가는 길은 어디에?
그 길을 알고 가시는지?
자신은 누구이며 그 실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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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부터 소생은 소싯적부터 한 번 반추(反芻)하여 본다.
경상북도 영주군 순흥면 지동 1리 796번지!
여기가 소생이 70년 전에 어머님의 모태로부터 세상에 일성(一聲)을 울리고 나온 곳이다. 즉, 안태(安胎) 고향이다. 한반도의 허리를 이루며 북에서 남으로 내리 달리는 백두대간(白頭大幹) 태백 줄기에서 서(西)로 뻗어 내린 호랑이 갈비뼈 같은 소백산(小白山)이 용트림을 하면서 잠시 멈춘 곳! 산스 크리스 트어의 '태양'이라는 '비로자나불(부처의 육신이 아닌 진리의 모습)'에서 그 이름이 온 비로봉(毗盧峯)을 필두로 국망봉. 연화봉. 도솔봉들이 우뚝 솟아서 민족혼(民族魂)의 정기(精氣)를 뿜어내는 명산 중의 명산을 이름하여 작은 '백두산'이라 하여 '소백' 산이라 한다.
소생이 이 아름다운 산. 소백산의 정기를 받고 소백산 남쪽으로 흐러드는 '죽계천' 한 물머리의 '순흥면 지동리 못골'에서 1954년 여름이 한창이 유월 보름날에 모내기를 하느 날 아침에 우리 어머님의 태를 매고 세상에 나왔다고 하신다. 그 무더운 여름날에 해산의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아들 손(孫)이 귀한 안동 권문에 큰 일을 하신 것이다. 온 순흥면이 떠들썩했다나 어찌했대나?
사실 소생 위로 누님만 세명이었다. 귀하게 태어났으나 엄격하신 유학자이신 선친은 소생 나이 오 세에 회초리로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을 가르치시고 '참 사람'되어 이 나라의 큰 사람'이 되라고 교훈하시었다.
이 순흥면은 역사로 보면 너무나 큰 일들이 일어난 곳이기에! 단종의 억울함을 되돌리기 위한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순흥부의 억울한 민초들이 수 만의 목숨을 잃은 곳이다. 그 당시 주모자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처형되고 순흥부 인근 30여 리의 무고한 백성들의 목을 베어 그 피가 십여 리를 흐르다 그쳤다 하여 지금도 그 지명이 '피끊'이다. 소생의 집 앞의 죽계천에서 벌어진 크나큰 역사적인 일이었다.
순흥 국민학교 제 54회를 졸업하고 당시 시골의 수제들만 입학한다는 영주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순흥국민학교 바로 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백운동서원'을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웠고, 이어서 이서원은 사액서원으로서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개명된다. 이곳은 지금도 경상도 북부 유림(儒林)의 본산이며, 오늘도 '영주 선비촌'을 이끌며 지방 향학의 선비들을 배출하고 있다. 성씨 '순흥 안 씨'는 고려 최고의 성리학의 대가이신 '안향(安珦)' 선생님의 고향이 바로 '순흥'이다. 소생은 아버님의 명에 따라서 매일 아침 국민학교 등교 시에 안 비단(安碑壇)에 꼭 '읍'(揖)으로 인사를 올렸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어린 시절의 기억들! 6.25의 정전 후 먹을 것이 너무나 부족하였던 때인지라 너도 나도 모두 다 가난에 찌든 그 시절이었다. 봄에 춘궁기에는 산에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들에서는 쑥을 뜨어다 먹기도 했던 기억이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는 개울가의 버들강아지를 훑어서 소쿠리에 담아 집에 와서는 돼지죽을 끓이고, 떡 개구리를 잡아 구워 먹고, 골뱅이. 시냇가의 버들치와 모래무지. 꺽지를 잡고, 죽계천 모래밭에서는 씨름으로 건강단련? 무 밭과 감자밭은 우리들의 단골 서리터! 그래도 한문공부는 하루도 배 먹지를 아니하였던 그 기억. 그 덕에, 그 무서운 선친의 가르치심으로 사람의 도리를 그나마 공부하였음이 소생의 전 인생에 얼마나 큰 복이던가! 그 로인해 일본어와 중국어 베트남어를 아주 쉽게 마스터할 수 있었음이... 아버님 머리 숙여 절 드리오니. 감사하옵니다!
(소생의 어머님의 생전의 모습! )
(오늘이 2021. 8. 4. 이 시간은 다시는 뒤로 가질 않는다!. 오늘 이 시간은 어제 이 세상을 하직하신 분들이 하루만 더 살기를 원하여 그렇게도 갈망하던 '내일'이다.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가요! 인생 무근채...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질 않으니... 오늘이 소생이 있도록 이 세상에 보내주신 소생의 어머니... 진주 하 씨 가문의 여중군자. 하 임수 여사님의 생전의 모습. 2010. 11. 30. 에 졸하시다. 향년 99세 10월... '사육신 하위지 할아버지의 직계손)
여중군자! 진주 하(河)씨 가문으로 안동 권문에 18세에 혼례 하시어 슬하에 1남 4녀를 두셨다. 어머님의 댁호(宅呼.花山宅 : 조선 문종의 국구. 화산부원군이 왕비의 친정아버님의 벼슬!)를 화산부원군의 '화산'을 따서 지으셨다고 선친은 말씀하셨다.
양반가문의 출신(진주 하 씨) 답게 사육신의 한 분이신 충절의 집현전 학사! 수양대군의 칼날에 돌아가신 사육신 중의 한 어르신 하위지(河緯地) 학사의 직계손의 모범을 보이셨고, 집안의 대소사에는 솔선수범하시어 가문의 본을 보이셨으며, 언제나 뵈 오면 웃는 얼굴로 사람을 공대하고 어른을 섬기시고, 83세에 작고하신 강릉 유 씨의 제 조모님께 어려운 살림살이 가운데서도 지극정성 공대를 하시었으며, 항상 겸손과 인자하심을 잃지 않으시고, 매사를 처리함과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언제나 후덕함을 베푸심으로, 순흥면에서 주는 열녀 표창을 스스로 거절하신 그야말로 조선시대의 여인이셨다. 어머님의 존명은 하임수 집사님!
한글의 붓 필이 너무나 훌륭하시어 온 가 근동에 혼사의 강서함과 사주단자를 다 써주셨고, 봄이면 해마다 '화전가'를 지으시어 동네 사람들의 흥을 돋우시니 인근 동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 영민하심이 그 시대의 '중용의 도'를 실천하셨고, 저에게는 커다란 별과도 같으신 어머님이셨다. 불민한 소생이 철이 조금 들어서 외국생활을 마치고 근 10여 년을 이 청산 땅에서 모시었으나, 참 효도를 다 하지 못함을 지금도 애통해한다. 그 며느리인 제 내자(內子. 해남 윤 씨)는 어머님을 모시는 11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생과일 즙을 대접해드리고, 말벗을 해드리고, 참 다운 그리스도인의 도를 실천하였다. 어머님의 말씀마다 순종하는 마치 조선시대 여인의 모습으로 효를 행하였다. 2011. 10. 31. 에 99세 10월을 일기(一期)로 아침에 깊은 잠에 드시어 그 길로 소 천하 시었다. 돌아가시기 전 한 달부터 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고 소원하신 캐나다로 이민 간 큰 따님을 오라 하시어 큰 딸의 옆에서 일주일을 같이하시고... 잠이 드신 채로! 그 성함대로 임수(任壽)! 자신의 명을 하늘에 맡기고,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100세를 두 달 남기시고 영원 복락의 세계로 돌아가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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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계속 이어지오니... 2022. 12. 12. 월. 밤 11시경에.
청산 산방 지기. 소천이 글 쓰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 세월의 강은 흐르고... 나그네는 그 돌다리들을 하나씩 조심스레 건너다.
행여 넘어지면 이젠 못 일어나니까!. 오호 통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