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쓰는 글의 주제는 '무자진경(無字眞經)이라는 말의 씀. 즉, 말씀이다. 옛 聖賢들은 '말의 씀'이 바르고 德스럽고 仁慈하며 海諒의 道가 이었기에, 이들을 일러서 '성현의 말씀'이라고 하였고, 우리네 보통의 범부(凡夫)들이 쓰는 말은 그저 '말'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바로 마음에서 나오고 마음은 바로 108가지 煩惱의 生産工場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입만 열면 걱정, 근심, 공포, 불안, 미련, 喜怒哀樂과 生老病死를 '말'하는데, 그저 자기의 아주 적은 相識뿐이지만, 聖賢들의 '말의 씀'은 즉, 그 말씀은 인간의 심성을 바로 다스리기에 적합하고도 논리적이셨다. 그래서 '말'과 '말씀'이 다르다... 그대는 오늘도 말을 하시는가 아니면, 말씀을 할 것인가?
결국에 말과 마음은 내 안의 것이지만 이것이 밖으로 나올 때는 지극히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함부로 '씀'은 선보다는 악을 초래하고, 칭찬보다는 험담을 가져오고, 성공보다는 패망에 이르니 삼가 말과 마음의 그 '씀'을 심히 경계해야 하는 법! 기독교의 성경이나, 불교의 수많은 경전이나 , 유교의 사서오경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동학의 그 많은 사상의 글은 모두 성현들의 입을 통해서 나온 것을 후대의 제자나 친족이 기록한 것들이다.
이 시간의 주제는!
그러나 오늘은 어찌하여서 그 글 안에는 참 이 없고 가르침이 없다고 말하는가? 누가? 달마대사라는 승(僧) 려께서 한 말씀이;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에 관하여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고승(高僧). 보리달마(菩提達磨, Bodhi Dharma). 천축 향지왕(天竺香至王)의 셋째 아들로 남조 양(梁) 나라 고조(高祖, 대통大通 원년, 527) 때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 광주(廣州)에 상륙할 때까지 갈대를 꺾어 타고 중국에 와 선종(禪宗)의 시조가 되었으며, 죽어서는 한쪽 신발만 가지고 서천(西天)을 향하여 사라졌다고...
그에 관한 일설은, 달마는 남인도 향지국(香至國-일설에는 페르시아) 이견왕(異見王)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27조 반야 다라 존자에게 법을 배워 대승불교에 능통하고 선(禪)에 통달했다. 520년경 중국에 들어와 북위(北魏)의 낙양(洛陽)에 이르러 동쪽의 쑹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간 면벽좌선(面壁坐禪)하고 나서, 사람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는 이(理)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 선법(禪法)을 제자 혜가(慧可)에게 전수했다.
참 법 중의 하나인,
불법의 중요 부분인 '여섯 인식기관(六根: 眼ㆍ耳ㆍ鼻ㆍ舌ㆍ身ㆍ意)과 그에 대응하는 여섯 인식대상(六境: 色ㆍ聲ㆍ香ㆍ味ㆍ觸ㆍ法)에서 특히 법은 인식ㆍ사고의 기능을 갖는 의(意: manas)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때의 법은 실체적 대상(vastu)으로서가 아니라 인식대상(viaya)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의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서 그 존재의의를 지니는 것이므로 불교 특유의 세계관이라 하겠다. 현대의 학자는 경험적(empirical) 법과 초경험적(transcendental) 법으로 나누기도 하며, 법칙ㆍ정당ㆍ규준, 교법, 진실ㆍ최고의 실재, 경험적 사물로 나누기도 한다.
불가(佛家)의 법과 도는 그 양과 수를 헤아리기도 벅차다. 그런데 그것들을 일생을 승방과 참선을 통화여 읽고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하리라... 그저 일부분 제게 맞는 구절을 떼어내고 해석하고... 인양!... 척하는 시늉과 흉내일 뿐이지 아니한가? 소생의 판단이 잘못되었나요? 중놈들에게 욕 들을 일이지만도! 그래서 어는 중이 이름이 난다고 하면 그 절에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사람의 입을 통하여서 무엇을 알고 깨달을 수가 있단 말인가? 산을 보고 산이라고 하고 물우리 보고 물이라고 하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말에 온 세상이 나리가 일어난다...
저나 나나 밥 쳐 먹고 화장실 가기는 매 일반인 것을... 좀 더 신성하다고? 무엇이? 그들이 걸쳐 입은 성스러워 보이는 가사장삼이? 목사와 사제들의 가운이? 독경이? 예배가? 기도가? 선행? 이 전도(傳道)라는 것이 과연 그 사람을 구원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인가? 모든 언(言)과 행(行)이 제 멋대로인 것을 누가 아는가? 성경에 4 복음에 2개를 더하면 '지가 복음'과 '내가 복음'인 것처럼... 마구잡이로 피워대는 향로의 향이 그리도 신성스러운가? 촛불이 타는 것이 그리도 성스러우면 매일 촛불울 들고 다녀야지! 사제(司祭)라고 하는 자들이 촛불을 제단에 켜고 향로를 들고 흔들면 잡귀가 물러가나? 불전함과 헌금함에 돈이 안 들어가는 날은 깨달음도 없고 도가 사라지는가? 생일감사헌금이 목사에게 전해지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뿔이 나는가? 헌금을 주보에 발표하지 아니하면 하늘의 축복이 막히는지?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고... 예수! 그 위대하신 그 참 이름의 뜻이나 아시는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 무자진경(無字眞經)! 이 말은 '글과 글자 안'에는 '참 가르침. 즉, 경전이 없다는 말이외다. 한자어의 경(經)의 뜻은 '가르칠 결, 글경, 지날 경'의 뜻을 지닌다. 이 말이 나오는 출처는 '달마노조게송(偈頌)'의 후반부이다.
달마서래일자무(達磨西來一字無)
전빙심의용공부(全憑心意用功夫)
약요지상구불법(若要紙上求佛法)
필첨잠건동정호(筆尖潛亁洞庭湖)
그 뜻을 새겨보면,
달마는 서천에서 한 글자도 가지고 오지 아니하였으니
오로지 심의(深意)에 의지하여 공부하라
만약에 종이 위에서 불법을 구한다면
동정호 호수에 붓끝으로 그 물을 찍어서 다 말려 보려무나!
여러분은 동정호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
동정호는 중국의 후난 성(湖南省) 북부, 장강(長江) 남쪽에 위치한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담수호. 洞庭湖는 산천이 아름답고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예부터 '동정호는 천하제일의 호수이다. 이 호수의 물을 붓끝으로 찍어서 말리라고...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글을 읽고 그 안에서 도와 진리를 참으로 발견하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 아니. 없다. 무자진경이다. 즉, 경전의 글을 읽어서 무엇을 깨달을까 바라지 말라. 求道의 참 방법을 가르침이다. 어쩌면 이 말은 이해가 짧은 종교인들은 힐난(詰難)의 소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인 것을 어쩌랴? 팔만대장경을 다 외운다고 극락정토에 들어갈 것인가? 성경을 일천 독을 한다고 천국이 보일 것인가? 마치 티베트 불교도들은 귀찮으니 마니차를 손으로 한 번 돌리면 불경 전을 읽은 것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자신의 경전을 가지고 있다. 도한 그것을 세상에 둘도 없는 진리로 믿고, 포교하면서 그 진리를 믿으라고 한다. 도대체 진리라고 하는 말의 그 명확한 기준은 무엇인가? 사람은 자기가 경험하고 듣고 보고 아는 것만큼만 안다. 그 이상을 도저히 넘어서지를 못했다. 그래서 물을 보고 물이라 하고, 산을 보고 산이라 한다. 그 말이 진리인가? 지극히 평범한 말이고 생각이다. 사람들은 거기에 자신의 입장을, 학식을, 경험을 대입하여 대리만족하고 마치 자신이 도인인 양 말하고... 체 한다.
그 누가 무엇이라 해도 진리는 그 모습을 쉽게 들러내지 아니한다.
인간이 그저 찾은 척할 뿐이다. 그래서 종교계에서는 남들과 좀 다르면 ,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모여든다. 도 어는 지도자가 한 번 유행시키면 그대로 다라 한다. 기독교에서는 어느 날부터인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라고 한다. 소생이 어릴 적에는 없던 말이다. 뻑하면 아멘과 할렐루야이다 그 참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사람이 하면 담보 떼처럼 다 따라 한다. 안 하면 마치 바보가 되는 것처럼... 불교에서는 만나고 헤어지면 '성불(成佛)하라고 한다. 성불보다는 행불(行佛)이 먼저가 아닐까요? 행함이 없는 이룸이 어디에 있을까나? 구원과 해탈이 형식과 틀의 완성을 이룬다고 올 것인가? 혹자는 그것이 못 이루어짐은 오직 정성이 부족해서라고 한다. 진리는 이런 것이다.
아침에 해 뜨고 저녁에 달 뜬다. 변치 않고 늘 우리 곁에 있다. 이것이 진리이다. 참 어리석은 생각으로 누구에게 의지하고 의탁하여서 덕을 보려고 하는 세대이다. 오호! 통제라... 기도를 부탁한다고 한다. 말이 되는지 모르겠다. 기도는 자신이 하는 것! 촛불공양. 기왓장 불사. 천도재. 49제. 이것들이 다 틀이다 형식이다 틀과 형식을 무척 좋아하는 민족이니 그렇게 발전시켜 왔다. 누가? 종교지도자님들께서...
이제는 구원이나 해탈이 형식이나 틀을 행하여야 온다고 하는 그 어리석음을 버릴 대도 되지 아니한가?
우리가 그토록 목메게 찾는 진리는 결코 멀리 있지 아니하다. 내 안에서 찾으시기를... 그것이 무엇인지는 깊이 생각하고 감사하는 사람만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 우리는 시공간에 살고 있다. 시간과 공간이 과연 무엇인가? 모두 다 바뀜을 의미한다. 바뀌지만 안 바뀌는 것도 또한 이 시공간(時空間)이 아닐까? 즉,. 변화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아니하는 것은 진리 외에는 없다. 변하면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의 경전들을 잘 보시라. 그 글이 쓰일 당시의 사회적 시대적 환경이 너무나 변해왔다. 그래서 진리는 그대로이나 변하는 것에 적응하여 그 시대적 역사적 변화를 종교 지도자들은 너무도 잘 이용하고 적용해 왔다. 그 종교의 형식과 틀은 언제나 사람의 목적에 맞도록 변화한다. 그러나 변화는 해야지만도 변질은 아니 된다. 그런데 오늘날 변질된 저들만의 형시과 틀(frame)이 얼마나 많은 부작용과 역 진리인가를...그런데 저들에게는 이 짓을 안하면 돈이 안들어오니...
전도를 해야 하니 대중 안에서 가사장삼을 입고 트로트를 부른다?
전도를 해야 하니 그 방법은 문제가 안된다?
참! 참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실천할 때이다. 알고 행치 아니하면 알지 못함만 못하니...
나를 참으로 다듬는 사람은 자신을 나타내려 하지 아니한다. 공자님의 말씀에, '인부지이불온이면, 군자호라'하시었다.
이 전 우주를 살펴보면 그 안의 무량수(無量數)의 개체들이 그 주기에 차이만 있을 뿐, 그 무엇이든지 다 추하추동의 변화를 겼는다. 하지만 이들은 인간의 심성처럼 가볍지 아니하다. 함부로 흔들리지 아니한다.
오행(五行)의 목화금수토(木火金水土)도 이릉 겪어야 하고, 주역이 말하는 원형이정(元亨利貞)도 매 한 가지로 춘하추동을 겪는다. 이것이 진리이다. 인간도 이 진리 안에 있을 때에 가장 복된 것이다. 이것을 깨트리니 이 지구와 세상이 무너지고 미처 날뛴다. 태어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으면 갈무리하고... 이것이 바로 순(順)이다. 하나 역은 그 반대이다 '역(易)'은 곧 패망이요, 멸절이다. 인간이 이 진리를 역행하는 순간부터 패망은 진행되어 온 것이다. 저 북극점의 영구의 만년설이 녹아내리지 않는가? 자연 시공간의 의미를 알지 못한 인간의 무지가 결국에는 이 지구를 깨트릴 것임이 분명하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에게 분명히 교훈한다.
다음에 공간은 무엇인가?

USA. Westerminster theology graudate에서 Thm.을 마친. 전 직 Minster(8년 간)의 사람이 쓴 '불경' 글씨이오니...
전세게의 목사들이 공부해야 할 반야심경 올시다!
끝을 맺으려 한다. 밤과 낮이 서로 부딛치지 아니하고 돌아가는 진리!
무자진경이라...
글 안에는 진리가 없으니 유념들 하시라!
2023. 8. 5. 일요일. 몹시도 더운 날
청산 산방에서. 지행선사 소천이 이 글을 쓰다.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여!)